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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까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근대문화유산은 600건이 넘습니다. 근대건축 문화재의 경우, 역사적인 형태를 살리면서 공공건물로 리모델링하는 사례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발논리에 밀려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질 근대 건축은 훨씬 많습니다. 한번쯤 그 시대의 건축가들을 되돌아보고 싶었습니다. 일그러진 근대의 일그러진 건축가들을 말입니다. 잊혀진 건축가들을 통해 그 시대의 또 다른 이야기를 알게 되면, 개발에 대한 관점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보존 방식도 좀 더 다양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 기자 말

 <Korean Student Bulletin> 1923년 4월호. 박인준은 앞줄 가운데.
 <Korean Student Bulletin> 1923년 4월호. 박인준은 앞줄 가운데.
ⓒ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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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향한 곳은 독립운동 일번지 만주가 아닌 상하이

1923년 4월 < Korean Student Bulletin > 1면 사진에 그가 있었다. Y. J. Park이라는 이름과 함께. 그 사진은 1923년 7월 17일 <동아일보>에도 실렸다. 기사 제목은 '시카고의 조선학생', 부제는 '성적 우량으로 칭찬이 자자', 관련 학생들 명단에 Y. J. Park인 박인준이 있었다.

박인준은 그 후로도 국내 신문에 더 나왔다. 1923년 10월 12일 '북미조선유학생 제1회 총회 시카고에서 모였었다' 기사에 '총무' 박인준이 있었다. 1928년 11월 18일 '이재민 구제금답지'의 시카고 교민 명단에도, 1931년 8월 22일 '충무공유적보존 성금'의 달러 송금 명단에도 그의 이름이 있었다.  

박인준은 일제강점기 유일하게 미국에서 정규대학코스로 건축교육을 받았다. 미국에서 건축 실무를 했던 사람도 그가 유일했다. 다른 조선인 건축가들은 대부분 일제가 만든 3년제 관립 경성고등공업학교(아래 경성고공)에서 건축을 배웠다.

졸업 후에는 총독부나 관련 기관에서 건축 일을 했다. 건축교육의 목적과 수준, 실무 환경 등 박인준은 남다른 경험을 했다. 그랬던 그가 귀국을 하자, 그 경험을 활활 태우지 못하고 고요한 섬이 되었다. 왜 그랬을까?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무단통치 시절이었다. 이십대의 박인준은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수학물리과의 약칭) 학생이었다. 피 끓는 청년은 항일 구국 운동에 가담했다. 결국 일본 경찰에게 쫓기는 처지가 되었다. 선택은 하나, 중국행이었다. 하지만 그가 향한 곳은 독립운동의 일번지 만주가 아니었다.

상하이였다. 동양무역과 해상교통의 중심지,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드나들며 국제적인 여론을 형성하고 온갖 정보를 수집하는 곳, 동서양의 문화가 충돌하고 융합하는 공간, '동양의 파리'로 불렸던 코즈모폴리턴의 도시였다. 

상하이는 혁명의 도시이기도 했다. 신해혁명 이후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세계의 혁명인사들이 모여들었다. 나라를 읽은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도 상하이를 활동 무대로 삼았다. 상하이를 통해 국내와 미국, 하와이의 독립 운동가들이 연결되었다.

한 손에는 혁명을, 다른 손에는 첨단 지식과 문화를 붙잡고 싶었을까. 상하이로 간 조선의 청년들은 의외로 많았다. 그들은 유학생이거나 망명자이거나 혹은 둘 다였다. 여운형은 난징의 대학에서 유학을 하다가 상하이로 옮겨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김마리아는 국내에서 하던 여성 항일 조직 활동이 발각되자 상하이로 망명했다. 임시정부 의정원 일을 하다가 중국대학에 입학한 후 중국인 여권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독일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 이미륵도 3·1운동으로 수배를 받게 되자 상하이로 망명, 임시정부 일을 거들다가 중국 여권을 구해 유럽으로 갔다. 3·1운동 전이긴 하지만, 박인준도 김마리아나 이미륵처럼 상하이로 왔다가 또 그렇게 상하이를 떠났다.

언어 장벽과 학업 수준, 망명 유학생들은 미국에서 허덕였다

박인준이 탄 배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러나 박인준은 혼자 힘으로 미국 땅을 밟을 수 없었다. 그는 이른바 '신도학생(新渡學生)', 1910년 강제병합 이후 총독부 여권 없이 미국에 온 망명 유학생이었다. 미국 내 한인사회가 조직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보증이 있어야만 입국이 허용되었다.

망명 유학생들은 입국을 해도 당장 먹고 사는 문제로 허덕였다. 언어 장벽과 학업 수준 차이로 바로 진학할 수도 없었다.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생계비를 벌고, 현지 소학교나 중학교에 들어가 영어 수업을 들었다.

20대 후반 조선 청년이 미국의 소학교에서 백인 아이들과 수업을 듣는 것이 낯선 풍경은 아니었다. 1910년대 540여 명의 망명 유학생들은 맨땅에 헤딩하는 고학생활을 하면서 단체를 만들었다. 학생신분이라 한계가 많았지만 결속력을 다지고 독립운동에 기여하려고 애를 썼다.

1917년 미국에 온 박인준은 시카고에서 만년필 장사를 하면서 공부를 했다. 1923년 서른 한 살 나이에 유학생들이 결성한 최대 학생단체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에서 총무를 맡았다. 그의 사진이 실린 < Korean Student Bulletin >은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의 영문 기관지였다.

박인준은 그 해 루이스공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했고, <동아일보>의 '시카고의 조선학생'에 보도되었다. 다시 미네소타 주립대학 건축학과에 들어가 1927년에 졸업, 그 후 시카고에서 건축실무를 했다.

시카고, 건축사에서 '시카고파(Chicago School)'가 등장한 곳이다. 시카고파 건축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에 시카고에 지어진 오피스 빌딩 양식이다. 철골구조로 고층을 만들고 균질한 표면에 장식이 없는 형태이다. 오늘날 철골 구조 커튼월로 지은 고층 오피스 빌딩의 원조격이다.    

시카고파를 대표하는 건축가는 루이스 헨리 설리번(Louis Henry Sullivan, 1856-1924),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명언을 남겼다. 이 개념은 모더니즘 건축을 동경했던 1930년대 조선인 건축가들의 화두였다.    

설리번의 제자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1867-1959), 박길룡과 박동진이 특별히 좋아했던 건축가였다. 라이트는 당시 일본에서 각광을 받던 건축가로 도쿄 제국호텔을 설계했다.

라이트는 미국의 광대한 토지에 어울리는 '프레리 하우스(초원주택)'와 '유기적 건축'으로 유명했다. 형태와 기능, 자연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건축이었다. 서구 모더니즘에 목마르면서도 조선이라는 지역성을 담고 싶었던 조선인 건축가들이 반할만 했다. 그런 건축을 직접 보고 배우고 일했던 박인준이 귀국을 했다.

박흥식 주택 남측 전경과 1층 평면도, 출처: 임창복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
 박흥식 주택 남측 전경과 1층 평면도, 출처: 임창복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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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돌아온 박인준은 일본말도 잘 못했다

경성 연희전문 수물과. 새파란 학생으로 떠났다가 중년을 앞둔 교수가 되어 돌아왔다. 박인준은 건축학과 제도를 가르쳤다. 하지만 YMCA와 관련된 항일 사건으로 연희전문을 떠나야 했다(송율·안창모의 김희춘 대담자료, 1992). 1933년 그는 박인준건축사무소를 개업했다. 박길룡이 조선인 최초로 건축사무소를 연 다음 해였고, 박길룡건축사무소에서 가까운 공평동에 있었다.  

박길룡사무소는 경성고공 후배들과 총독부 건축직 동료들로 북적댔다. 그들은 박길룡이 수주해온 프로젝트를 경력에 따라 팀을 나눠 맡았다. 일하는 속도도 빨랐고 해내는 일도 많았다. 팀 위주로 하다 보니 프로젝트마다 디자인의 편차가 있긴 했다.    

박인준사무소는 아뜰리에 식으로 운영되었다. 설계는 박인준 혼자 하고, 공업학교 정도 나온 직원 두세 명이 도면을 그렸다. 그의 작품은 미국 영향이 짙고 디자인은 일관성이 있었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다양한 프로젝트가 없을 뿐더러 일 자체도 별로 없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박인준은 일본말도 잘 못했다. 일본 자본과 권력이 판치는 세상에서 일본인과의 관계도 거부했다. 혼자 미국에서 건축을 했기에 국내 건축계에는 학연도 직장 연고도 없었다. 고향은 평안남도 강서, 평양에서 보수적인 미션스쿨인 숭실중학을 졸업했다.

경성으로 와서 연희전문을 다녔지만 중도에 그만두었다. 인맥이 없으면 수주가 힘든 건축업에서 그에게 들어오는 일은 지인들의 주택이었다.   

그의 대표작은 가회동에 있는 윤치창주택(1936, 사우디대사관저), 윤치왕주택(1936, 현존), 윤치호주택(1936, 철거), 박흥식주택(1943, 개조)과 동대문부인병원장 그라보스주택(1930년말, 철거), 북아현동 조준호주택(1940년경) 등이다.

윤치창, 윤치왕, 윤치호는 형제였다. 윤치창은 박인준이 미국에 있었을 때 시카고 대학을 다녔고 해방 후에는 외교관이 되었다. 윤치창의 장인은 박인준의 매형 손정도였다고 한다. 손정도는 감리교 목사이면서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역임했다.

윤치왕은 세브란스 의학전문 교수였고, 사촌인 윤치영은 박인준처럼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에서 활동했다. 건축주만 놓고 보면 박인준의 인맥은 좁고 특수한 계층에 속한다. 동향인 박흥식을 제외하면, 근대 지식인, 전문직, 유학 경험자, 독립운동 경력, 개신교와 연결된다.

박인준이 설계한 가회동 주택 위치도
 박인준이 설계한 가회동 주택 위치도
ⓒ 네비버지도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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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였을까. 원로건축가들이 회고하는 박인준은 멀찍이 떨어진 존재였다. 박인준은 '대한건축학회'의 전신인 '조선건축기술단'에서 부단장(1945)을, '조선건축기술협회'에서 부이사장(1947)과 부위원장(1948)을 맡았다. 그 이름과 직함은 회지에 순간의 흔적처럼 찍혀있다. 남들처럼 자신의 목소리가 들어간 글이나 활동내용, 회고담이나 대담은 없다.

당대 건축가들이 그를 기억하는 방식은 이력서처럼 짧고 건조했다. 한국인 최초로 미국유학, 박인준건축사무소, 해방 후에는 미군정청, 대륙공영사 사장, 삼양공무소 회장.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모른다. 해방 후 활동이나 작품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해방 전 작업은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에 몰려있다. 거의 다 주택설계이고 장소는 가회동이다. 어쩌면 오늘날 설계자 미상으로 남아 있는 가회동 서양식 주택 중에 그의 작품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 그에 관한 자료는 빈약할 뿐더러 그 빈약한 내용끼리도 어긋난다. 박인준과 다른 건축가들의 거리감, 건축계에서 박인준의 위상이 그랬던 모양이다.      
상하이, 시카고, 미네소타를 두루 거치며 근대건축을 '목격한' 박인준. 식민지 안에서 일제가 던져준 자료로 근대건축을 '인식한' 건축가들. 개인의 성격 탓인지, 이른바 패거리문화 탓인지, 일제의 눈 밖에 난 박인준과 일제의 제도권에서 성장한 건축가들의 처지 탓인지, 민간건축가와 관료기술자의 의식 차이 탓인지, 아예 서로 쳐다볼 여유조차 없는 현실 탓인지…. 그들의 이질적인 경험은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서로 만나 부딪치고 연대하며 다른 지평을 조망하지 못했다. 억압받는 조선인, 건축이라는 전문 분야, 이 두 가지 공통점만으로는 공감과 연대가 부족했던 것일까. 돌아온 조국에서 박인준은 섬이 되었다. 일제의 섬, 조선인 건축계의 섬, 섬 속의 섬.


태그:#박인준, #근대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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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이 좋다. 길이 없지만, 내가 걸어가면 길이 되니까.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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