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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로안. 1969년 9월생으로 베트남 출신 한국인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베트남 전쟁 막바지에 아빠와 헤어지면서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했던 로안씨는 만 서른이 되던 해에 한국인을 만나 결혼하고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이 글은 한국인 아빠를 두고 있고, 한국 국적을 갖고 있지만, (한국) 사람들이 자신을 이주노동자 취급해서 이주노동자 지원단체를 찾았다는 로안씨가 아빠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전한 이야기를 기자가 풀어 쓴 글이다. 기자는 지난 6월말 로안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아빠 소식이라도... 기도한 지 38년이 지났건만

38년. 마치 이웃집에 놀러가듯 잠시 다녀온다던 아빠와 헤어진 지 38년이 지났다.

1975년 3월 베트남 중부 최대 도시 다낭과 옛 수도 후에가 월맹군에 함락된 후, 사이공도 곧 함락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월남이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 자명해 보이자, 돈 벌러 왔던 많은 기업들은 언제 짐을 싸야 할지를 두고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플로리다에 기반을 둔 미국계 기업의 관리 책임자였던 아빠는 전황을 냉정하게 판단하기 위해 베트남 접경국인 캄보디아로 떠났다. 그게 끝이었다. 그렇게 아빠와 연락이 닿지 않은 지 38년이 지났다.

아빠는 캄보디아로 떠나기에 앞서 조만간 가족들을 대피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주 태국 대한민국 대사관을 통해 엄마와 다섯 오누이의 비자를 1975년 4월 21일에 발급받아 두었다. 비자는 그 해 12월 21일까지 유효했고, 태국 혹은 대한민국을 거쳐 미국으로 갈 수 있는 비자였다. 비자 발급 목적은 '교육'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빠는 아무리 다낭이 함락되었다 하더라도, 미군이 당장 사이공까지 밀리지는 않을 거라고 보았다.

1975년 4월 21일에 발급된 비자는 12월 21일까지 유효했지만, 베트남전이 1975년 4월 30일에 종전되면서 비자는 쓸모가 없어졌다.
▲ 미국행 비자 1975년 4월 21일에 발급된 비자는 12월 21일까지 유효했지만, 베트남전이 1975년 4월 30일에 종전되면서 비자는 쓸모가 없어졌다.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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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군은 이미 단계적인 철수 작전을 입안하고 군사 고문, 외교관, 거류민, 동맹국 국민, 월남 핵심 지도층을 탈출시킬 계획을 진행 중에 있었다. 아빠는 그 계획에 앞서 캄보디아로 가면서 자신이 돌아온 후 온 가족이 함께 움직여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부패한 월남군은 중부 베트남이 함락된 후 순식간에 무너지며, 사이공마저 금세 내주고 말았다. 온 가족이 비자를 발급받은 지 열흘도 채 지나지 않은 4월 30일 새벽이었다.

사이공이 함락되고 전쟁이 끝나던 날부터 미군이나 미 군속을 가족으로 둔 베트남인들은 고국을 탈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와 함께 보트를 타고 떠났던 누구누구가 물귀신이 되었다든가, 공산당에 붙잡혀 처형되었다는 등의 흉흉한 소문이 자자했다.

엄마는 생때같은 자식 다섯을 두고 갈등하기 시작했다. 돌아오겠다던 남편을 기다리고 싶어도, 남편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적국 기업의 관리자다. 엄마는 남편 소식을 수소문하려 해도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보트를 타고 베트남을 벗어나고 싶어도 어린 아이 다섯이나 데리고 움직이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소식이 끊긴 남편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도 않았다. 결국 베트남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엄마의 결정은 남은 가족에게 너무나 험난한 결과를 가져왔다. 세상이 바뀌었고, 바뀐 세상에서 살아가기에는 '적국'의 아내요, 자식이라는 멍에는 녹록한 게 아니었다. 공산당은 교화를 이유로 미군이나 미 군속과 관계를 맺고 있던 모든 사람들을 '미제국주의의 앞잡이요, 공민권 행사를 할 자격이 없는 반동'으로 몰며 강제 수용했다. 강제 수용을 피한 사람들은 신분을 속이기 위해 고향을 떠나야 했다.

숙청과 교화라는 명목의 핍박은 아이들이 학교에 다녀야 할 시기가 되어도 그치지 않았다(로안씨는 자라면서 겪고, 보았던 자신을 비롯한 엄마와 형제자매들의 고생에 대해 굳이 말하려 들지 않았다. 다만 엄마가 할머니 댁의 도움으로 아이들을 돌보면서 매일 같이 세상이 바뀌어 아빠를 만날 수 있기만을 염원해야 했었다는 정도만 이야기한다 - 기자 말).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변한 게 없어

세상이 바뀔 징조는 1986년에 보이기 시작했다. 베트남 공산당이 당 대회에서 사회주의의 기초골격은 유지하면서 자본주의를 접목시키려는 개혁·개방 정책인 '도이모이'를 선언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1993년 한국과 베트남 공식 수교가 이뤄지면서 아빠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한껏 부풀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상처만 안겨주었다. 주 베트남 대한민국 대사관을 통해 아빠 소식을 수소문하며 국적회복신청을 시도했지만, 정보가 정확치 않다며 빈축만 샀다. 대사관에서 엄마와 다섯 오누이는 행여 '라이 따이한'이라는 핑계로 한국에 가려고 하는 사람 취급을 받으며 모멸감을 느껴야 했다.

아빠에 관해 알고 있는 정보는 세 가지다. 아빠 사진이 부착된 미국 법인 회사의 동남아시아 지역 관리자 카드에는 아빠 이름과 회사 직위가 적혀 있다. 집합장소에 모여 미군 철수 계획에 따라 철수할 대상임을 확인하는 주월 한국대사관 발행 확인증에는 남 1, 여 5명으로 로안씨 아버지가 동반할 가족 수가 적혀 있다. 마지막으로 엄마와 다섯 아이의 사진이 부착되어 있는 비자로 생년월일과 이름이 적혀 있다. 

흑백사진이지만, 로안 씨는 아빠 얼굴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 아빠 사진 흑백사진이지만, 로안 씨는 아빠 얼굴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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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난리통에 이 정도 정보면 가족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충분한 정보가 아니냐고 항변해 봤지만, 가족관계를 확인해 주어야 할 대사관에서는 "없어, 그런 사람 없어!"라는 말로 로안씨 가족의 국적회복 신청을 접수조차 받아 주지 않았다. 국적회복 신청 접수를 먼저 하고, 한국으로 와서 아빠를 찾으려던 계획은 물 건너갔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로안씨 가족에게 변한 것은 없었다. 적국의 딸이라는 굴레로 인해 베트남에서는 늦은 나이인 서른이 되도록 결혼을 하지 못했던 로안씨는 베트남에 사업차 왔다는 한국인을 만나 결혼했다. 결혼과 함께 1998년 로안씨는 어떻게든 아빠를 찾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국으로 왔다.

미제 앞잡이라더니, 공산당이라고 핍박

그러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남편은 사업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사장을 전전하는 일용직 건설노동자였다. 아빠를 찾는 일을 도와줄 것으로 기대했던 남편은 술만 먹으면 구타를 하며 고함을 쳤다. "빨갱이 새끼… 공산당 xx년…" 로안씨는 처음 '빨갱이'라는 말은 못 알아들었지만, 베트남어와 발음이 같은 '공산당'이라는 말은 알아들었다. 그리고 술만 먹으면 소리를 지르는 남편이 '빨갱이 새끼'라고 하는 말의 의미도 차차 알게 되었다. 남편이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릴 때마다 주위 사람들도 로안씨를 '월남댁'이라고 불렀고, 뒤에서 '베트콩' 어쩌고 하며 수군거렸다.

로안씨는 할 말을 잃었다. 베트남에서는 '적국의 딸'이라고 갖은 핍박을 받았는데, 그 적국 중 한 나라인 대한민국에서는 자신을 '빨갱이, 공산당, 베트콩'이라고 욕하고 수군거리는 현실에서 결혼생활은 무의미했다. 결국 1년 조금 넘게 결혼 생활을 한 후 이혼을 결심했다. 이혼은 아빠를 찾아야겠다는 생각도 접게 했다. 아빠를 만났을 때 아빠가 자신의 가족을 모른 척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홀로 생계를 이어가며 고향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뒷바라지해야 하는 팍팍한 생활은 아빠를 찾는 노력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로안 씨는 둘째로, 사진을 찍을 당시 막내는 세 살이었다.
▲ 로안 씨 가족 사진, 엄마와 다섯 오누이 로안 씨는 둘째로, 사진을 찍을 당시 막내는 세 살이었다.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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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로안씨 가족에게 2006년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베트남 전쟁혼혈인, 라이 따이한 등 외국주재 현지 2세 혼혈인이 한국국적 취득을 원할 경우 한국인 아버지의 확인과 상관없이 사진 등 객관적으로 친자관계를 입증할 자료가 있으면 국적을 부여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키로 했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은 대통령 지시사항이라는 말로 라이 따이한 가족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 소식에 따라 로안씨 가족은 다시 한 번 주 베트남 대한민국 대사관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싸늘했다.

"이제 와서 아빠 찾겠다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한국 가서 돈 벌겠다는 거냐? 이 정도 정보 갖고는 어림도 없다. 삼십 년도 더 된 흑백사진 갖고 와서 사람 찾아달라는 게 말이나 되느냐? 아빠 사진은 가족 사진에 나와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가족이라고 증명할 수 있느냐? 한 둘도 아니고 다섯 오누이가 떼거지로 나타나면, 한국에서 반기겠느냐? 한국에 있는 가정은 어떻게 되겠느냐? 당신들만 생각하면 안 된다."

대사관 직원은 한·베트남 수교 당시와 다를 바 없는 말만 되풀이하며 접수도 받지 않고 면박만 줬다.

아빠를 찾는 이유, 딸아이까지 차별받게 할 수 없어

아빠와 헤어질 당시 큰 언니는 8살이었고, 로안씨 자신은 7살이었다. 로안씨는 지금이라도 아빠를 만나면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한다. 베트남에서 십년 가까이 가정을 이루고 살았던 아빠가 한국에 돌아와서 가정을 꾸렸는지 모르지만, 아빠에게 엄마가 첫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로안씨 입장에서는 대사관 직원이 하는 말이 여간한 모욕이 아닐 수 없었다. 로안씨는 '(행복한) 남의 가정이나 깨려고 하는, 불순한 의도를 갖고 아빠를 찾는 못된 사람' 취급을 당했다고 여겼다.

로안씨는 그 모욕감을 다시 느끼기 싫어 아빠를 찾겠다는 생각은 다신 안 하기로 결심했다. 그랬던 로안씨가 요즘 다시 아빠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베트남에서도, 한국에서도 로안씨는 '본토인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 취급을 받는다. 그런 자신의 경험을 자식에게 대물림하기 싫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혼 후 몇 년이 지나 만난 베트남 남성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아이는 올해 여덟 살이다. 로안씨는 딸아이에게 한국인 할아버지가 있다면 최소한 자신과 같은 대우를 받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어딜 가더라도 당당하게 한국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아빠가 나타나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딸아이를 안아줄 것을 기대한다.

로안씨는 마흔 중반을 넘긴 나이가 되자, 그리움도 원망도 덤덤해졌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 38년 동안 아빠를 애타게 찾았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고, 찾는다는 이유로 모욕을 받았던 사실은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자식을 위해 그 정도 모욕은 감내할 각오를 하고 있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딸아이가 겪을 차별과 편견, 핍박을 막기 위해서라도 산전수전 겪으며 살아온 로안씨는 아빠를 찾아야겠다고 한다.

덧붙이는 글 | '혐오와 차별' 응모 기사



태그:#라이 따이한, #차별, #편견, #핍박, #이주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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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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