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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향 통영 출신의 정윤주 선생(전 한국작곡가협회 회장)은 교향곡, 협주곡, 무용조곡, 가곡, 영화음악 등 예술음악과 실용음악 전반에 걸쳐 한국 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작곡가이다.

 

음악을 너무나 사랑해서 평생을 창작에만 매달렸지만 영화음악의 대중적 인기에 비해 순수음악의 작품성이 많이 알려지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꼽힌다. 마지막까지 창작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정윤주 선생의 일생을 되돌아봤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정윤주 선생은 1918년 9월 29일 통영 동호동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는 아버지 정명호 씨와 어머니 박향월 씨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 시절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랬듯이 선생 또한 어릴 때부터 음악에 관한 정규적인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선생은 통영보통학교와 통영협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고등교육과정으로 서울에 있는 경성전기학교 토목과에 진학했는데, 이 시기 하숙집 친구들과 우연히 관람한 음악콩쿠르가 그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신인 성악가를 발굴하기 위해 마련된 이 콩쿠르에서 정윤주 선생은 출전자 15명이 부르는 슈베르트의 '그대는 나의 안식(Du bist die Ruh)'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서 무심코 한 구절을 따라 불렀는데 같이 있던 친구들이 놀랄 정도로 뛰어난 소질을 보여 '나도 성악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이후 선생은 성악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안고 학업 틈틈이 성악레슨을 받았으며, 1937년 경성전기학교 토목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남도청에 취업한 이후에도 계속 음악공부에 힘썼다.

 

선생이 첫 사회생활을 시작할 당시 부친과 얽힌 한 가지 일화가 있다. 정윤주 선생은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기 때문에 전국의 좋다는 직장은 어디에도 갈 수 있었고, 부친은 그런 아들이 대견해 양복을 해 입으라며 목돈을 마련해 줬다. 그런데 정윤주 선생은 그 돈을 모두 악보를 사는데 써버렸고, 부친은 "네가 광대가 될 거냐"며 그 명곡집을 모두 땅바닥에 내팽개쳤다고 한다. 아버지로서는 아들이 안정된 직장을 두고 음악을 좋아하는 것이 여간 걱정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성악가에서 작곡가로 전환한 과정 또한 이채롭다. 도청에서 잠깐 근무하다 서울에 있는 한강수력발전회사로 이직한 선생은 이승학 성악가(전 중앙대 예술대학원장)의 문하로 들어가 성악을 배웠으며, 부민관 무대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종로서점에서 수많은 작곡가들의 전기(傳記) 가운데 성악가의 전기가 한 권만 있는 것을 보고 '나도 작곡가가 되어 음악을 후세에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정윤주 선생은 생각을 바로 실행에 옮겼다. 당시 일본작곡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한 임동혁 작곡가의 기사를 잡지에서 보고 무작정 찾아가 작곡을 배우게 해 달라고 청했다. 그렇게 1주일에 2번씩 1939년부터 4년간 작곡이론을 사사한 선생은 1945년 조국 해방을 맞아 고향 통영으로 돌아와 통영중학교 음악교사로 7년간 근무했다. 이때 통영문화협회의 음악부장으로 윤이상, 유치환, 김춘수, 김상옥, 전혁림 등과 함께 활동한 바 있다.

 

선생의 첫 작품인 실내악곡 '현악 4중주 1번'은 1950년에 탄생했다. 이어 1952년 역시 통영 출신인 유치진 극작가(당시 국립극장장)에게 '까치의 죽음'이라는 대본을 받아 1시간짜리 전주곡을 완성했다. 이 곡은 육군교향악단(KBS교향악단의 전식)에 의해 그해 5월 초연돼 많은 음악인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데뷔무대의 성공은 정윤주 선생이 평생 음악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객석에서 '까치의 죽음'을 감상한 미국 공보원 관계자가 선생을 창원에 있는 리버티 프로덕션(미국공보원 산하 영화제작소)으로 스카우트 한 것이다. 선생은 음악을 위한 모든 시설이 갖춰진 그 곳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문화영화의 배경음악을 만드는 일을 하며 남는 시간 동안 마음껏 창작에 몰입했다.

 

그리고 1957년, '까치의 죽음'으로 한국음악가협회 제1회 작곡상을 수상하면서 국가의 부름을 받아 문화공보부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배경음악을 만들게 된다. 극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 무렵 선생은 신상옥, 김수용 등 내로라하는 감독들과 함께 '성춘향''벙어리 삼룡이''연산군' 등 유명영화의 배경음악을 도맡아 작곡했다.

 

또한 영화음악 작곡가로 이름을 떨치면서도 순수예술음악에 대한 창작을 게을리하지 않아 무용조곡 '사신의 독백', 교향시 '산', 교향곡 제2번 '속죄', 광복30주년 축전서곡 '포항제철', 교성곡 '해탈', 교향취주악 행진곡 '세병관' 등 주옥같은 작품 약 40편을 남겼다.

 

작품에 대한 완성도도 인정받아 제4·5회 한국작곡상, 통영시 문화상, 대한민국 화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으며, 1997년에 타계해 통영 산양읍 신봉마을에 묻혔다.

 

전통음악을 기본으로 한 현대적인 음악 작곡

 

정윤주 선생은 생전 "한국인은 한국적인 음악을 만들어야 된다"는 소신을 갖고 한국의 전통음악을 현대적인 음악으로 재창조하는 데 주력했다. 국악과 남도민요를 특히 좋아했으며, 동피랑에서 보이는 남망산과 동호항의 모습, 달빛에 출렁이는 파도 등 통영의 바다를 음악으로 표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교수직도 마다하고 평생을 창작활동에 전념했으며, 타계하던 해까지 작곡하던 교향곡 제5번 '염천'은 미발표곡으로 남았다.

 

 

아버지에 대한 회상

[특별기고] 정대은(약사, 정윤주 작곡가 삼남)

 

삶과 죽음이 명제일 뿐입니다.

 

아버지는 음악 그 속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택하고 꿈꾸고 사셨으며, 지금도 작품들과 함께 살아 숨 쉬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 역사의 험난한 외길의 삶을 걸으면서 시대를 앞서 내다보고 자나 깨나 쉬지 않고 생을 다할 때까지 음악에 대한 어떠한 말도 그 자체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누가 말했듯이 음악에 무한한 열정과 사랑을 갖고 오로지 창작에만 전념한 작곡가로 사셨습니다.

 

평상시에도 늘 그랬듯이 양복 호주머니 속엔 오선지와 4B연필을 갖고 다니시면서 머리에 떠오르는 악상을 가슴에 담아 혼신을 다하여 용광로처럼 녹여 작품을 만드셨습니다.

 

새벽을 일찍 열고 마음은 동심으로 따사한 봄날의 햇살같이 환하고, 얼굴은 여유와 미소로 무척 소박하고 겸손하셨고, 무소유로 전혀 욕심이 없이 티 없이 맑으셨습니다.

 

아버지의 고향은 파란 물속의 남쪽 바다에 400여 년 전 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이 충무공의 혼이 서려 있는 통영입니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아침마다 동호동 집에서 남망산과 주위의 탁 트인 항구 동편 망일봉의 밝고 힘차게 솟아오르는 붉은 해를 바라다 보셨습니다.

 

밤만 되면 동호항 바다에 제일 먼저 달이 돋는, 잔잔한 환상적인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가진 고향에 대한 애착이 남달리 유별나셨고 그 곳 사람들을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영면의 장소도 통영을 택하셨습니다.

 

5개의 교향곡, 교향시, 칸타타, 무용조곡 등의 수십 편의 관현악곡, 합창곡, 협주곡, 실내악곡, 가곡, 영화음악 등 수많은 작품들은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 고유의 전통음악을 바탕으로 민족적이고 현대적인 음악으로 재창조했습니다. 민속적이고 민족적인 소재와 음률을 토대로 한국적인 멋과 맛을 음악이라는 인류 공통 언어로 진정 누구나 느낄 수 있게끔 개성적이고 독창적 한국 문화와 정서를 악구 악구마다 물씬 쏟아 부었습니다.

 

나라를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과 조국통일에 대한 간절한 갈망을, 그리고 인간의 삶 구석구석에 살아 움직이는 마음의 느낌과 사상을, 더 나아가 삶과 죽음의 철학적 종교적 문제를 예술로 승화시킴으로써 방대한 스케일의 음악으로 형상화 하였습니다.

 

우수한 우리 문화의 진정한 세계화라는 일관된 생각으로 우리 소리를 찾고 한국 음악의 정체성을 떳떳이 내세우는 자세로 심혈을 기울여 작품을 만드셨습니다.

 

이제 몸은 비록 가셨지만 작품들은 살아남았습니다. 생전에 우리 음악계를 늘 격려하시고 아끼며, 칭찬하며 몸소 화합을 실천하고 미래를 희망적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새로운 21세기를 맞이하는 우리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여러 위대한 한국 작곡가분들의 작품들을 보존하고 사랑하며 문화유산으로서 창작음악을 더욱더 할애하여 연주를 많이 하는 것이 다문화 세계에서 한국 음악을 널리 알리는 것이며 우리 후손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려투데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정윤주,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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