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포스터 봉준호 감독의 <마더>는 올해 한국 영화가 이룬 최고의 성과물이었다.

▲ <마더> 포스터 봉준호 감독의 <마더>는 올해 한국 영화가 이룬 최고의 성과물이었다. ⓒ 바른손(주)


매일매일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는 우리 삶에 가끔은 뒤통수를 후려치는 충격이 휩쓸고 지나가기도 한다. 온화하게 구성된 현실에서 우리를 이탈시켜 세상의 실재를 각성시키는 것들과 조우할 때가 있다는 말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삶 속에는 봉인된 비밀의 문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소수의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를 본 후 그러한 나의 생각은 점점 더 확신으로 차올랐다.

봉준호 감독의 네 번째 장편 영화인 <마더>는 올해 한국 영화가 이루어낸 최고의 성과물이라 할 수 있다. 경쟁부문에 초청받지는 못했지만 칸에서의 호평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기대는 부풀어 올랐고 더욱이 소문에 의하면 아들을 연기한 원빈이 지적 장애를 가진 '바보' 역할을 맡았다는 점 때문에 <마더>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봉준호의 영화에는 장애인이 유독 많이 등장한다. <살인의 추억>의 백광호, <흔들리는 도쿄>의 히키고모리 청년, 그리고 <마더>의 도준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문제작이라고 할만한 좋은 영화들이 그러한 것처럼 장애는 서사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마더>는 장애인, 혹은 장애를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장애를 이 이야기의 시작으로 삼았을까?

경찰서에 잡혀온 진태와 도준 도준은 엄마의 시선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동네 양아치인 진태와 몰려다니며 사고를 친다.

▲ 경찰서에 잡혀온 진태와 도준 도준은 엄마의 시선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동네 양아치인 진태와 몰려다니며 사고를 친다. ⓒ 바른손(주)


도준(원빈)은 엄마 혜자의 표현을 빌면 벌레 한 마리 못 죽이는 심성과 사슴 같은 눈망울을 가진 아들이다. 동네 양아치인 진태(진구)와 어울려 다니면서 호구 노릇이나 하는 모자란 아들 때문에 혜자는 한 날 한 시도 도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녀의 오감은 오로지 도준을 향해서만 열려 있고 그를 통해서만 살아 있다. 아들을 좇는 시선 때문에 일상적인 일(작두질)조차 잘 할 수 없다.

지적 장애의 경계에 있는 듯 보이는 도준은 엄마와는 반대로 엄마의 시선에서 잠시만 벗어나면 동네 양아치와 몰려다니며 사고를 치고, 귀가하는 여고생의 뒤를 따라가고, 심지어 노상방뇨를 해댄다. 도준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있어도 있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존재'이다. 그런 그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서 '바보'라고 놀리는 순간에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도준을 위협하는 세상의 날것들과 맞서는 <마더> 마더는 세상의 원초적인 날것들과 대결하여 헤쳐나와야 한다.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고 한 발도 뒤로 물러설 수 없다

▲ 도준을 위협하는 세상의 날것들과 맞서는 <마더> 마더는 세상의 원초적인 날것들과 대결하여 헤쳐나와야 한다.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고 한 발도 뒤로 물러설 수 없다 ⓒ 바른손(주)


'마더' 혜자의 삶은 그대로가 전쟁이다. 죽거나 버티거나…. 다섯 살의 도준을 살해하고 자신도 죽으려고 작정한 순간 마더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도준이 살인사건에 휘말리고부터 마더는 더 이상 안전하게 구성된 현실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마더는 세상의 원초적인 날것들과 대결하여 헤쳐 나와야 한다.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고 한 발도 뒷걸음질 칠 수 없다.

연기 경력 47년의 김혜자도 힘겨워 했다는 죽은 아정의 장례식장 신을 보면, 번들번들한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돌아가는, 속된 말로 '눈이 뒤집히는' 마더의 광기에 동네 사람들은 '미친년'이라고 욕을 한다. 하지만 아들의 결백을 믿는 마더는 처음으로 아들만을 좇았던 시선을 거두고 아들 도준을 위협하는 세상의 날것들과 맞선다. 아들 도준을 구출해내는 싸움이 끝난 후 마더는 몸서리쳐지는 세상의 실재에서 환영 같은, 온화한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스스로 허벅지에 '망각의 침'을 찌른다. 죽거나 버티거나 아니면 잊거나….

세상에는 수많은 엄마들이 살고 있지만 어느 누구를 꼭 집어 보편적 엄마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영화 <마더>는 보통의 엄마로서는 체현 불가능한 '엄마의 보편성'을 혜자에게 새겨 넣고 있다. 자식을 지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광기로 폭주하는 '마더' 혜자에게  현실의 상징적(법적) 질서는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다. 도준을 대신하여 붙잡힌 또 다른 희생양(불행히도 그는 다운증후군 장애인이다)에게 혜자가 던지는 말은 "너, 엄마는 있니?"이다.

혜자는 모든 상징적 의미를 벗어버리고 엄마 그 자체로 돌아간다. 엄마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예외적인 개별자 - 살인한 아들을 구해내기 위해 살인도 무릅쓰는 엄마 - 가 된다. 만약 아들 도준이 장애인이 아니었다면 완벽한 원초적 엄마로서 혜자의 아우라는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망각의 침'을 놓는 혜자 <마더>는 보통의 엄마로서는 체현 불가능한 엄마의 보편성을 혜자에게 새겨놓고 있다.

▲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망각의 침'을 놓는 혜자 <마더>는 보통의 엄마로서는 체현 불가능한 엄마의 보편성을 혜자에게 새겨놓고 있다. ⓒ 바른손(주)


이 땅에서 장애인을 자녀로 둔 엄마들은 보편적 엄마로서 혜자의 모습을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장애인의 권리가 아직 충분히 실현되지 않은 이 사회에 의해 강요된 부분으로서 부모들이 장애인 자식에 대해 떠맡아야 할 책임도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원초적 엄마로서 자식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상징적 우주 질서 속에서 자연스럽게 분리되어야 할 엄마와 아들의 원초적 관계가 장애인 아들과 엄마는 분리되지 못한 채 남아있다는 의미에서 나는 장애인을 둔 엄마만이 원래의 진짜 엄마라고 부르고 싶다.

장애 영화 장애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