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잡이 키릴 라자로프(왼쪽)와 우리 문지기 박찬영의 사진이 실린 대회 공식 누리집(www.croatia2009.com) 첫 화면

골잡이 키릴 라자로프(왼쪽)와 우리 문지기 박찬영의 사진이 실린 대회 공식 누리집(www.croatia2009.com) 첫 화면 ⓒ 국제핸드볼연맹

 

마지막 경기, 18초가 남았다. 한 골을 뒤지고 있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작전 시간을 요청한 최태섭 감독은 선수들을 모아놓고 작전판을 펼쳤다. 센터백 정의경을 거쳐 라이트백 이은호에게 마지막 원 스텝 슛을 주문했다. 그 주인공이 팀의 막내(20살 이은호)였기에 더욱 놀라운 순간이었다.

 

그 순간, 2008 베이징올림픽 여자핸드볼 동메달 결정전(한국-헝가리) 끝무렵 임영철 감독이 우리 선수들을 향해 주문한 한 마디가 떠올랐다. "마지막 1분은 언니들이 뛴다."

 

한국 남자핸드볼 세대 교체에 의미를 두고 이번 크로아티아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사표를 던진 남자대표팀의 최태섭 감독은 반면에 새내기에게 마지막을 장식하게 했던 것이다. 이 한 장면 만으로도 그 목표는 이미 이룬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쉽게도 5초를 남기고 던진 이은호의 슛은 상대 수비벽에 막혀 힘없이 골문 앞에 떨어졌다. 본선 12위, 아쉬운 결말이었지만 그들은 아홉 번의 인상적인 경기를 크로아티아 땅에 남길 수 있었다.

 

최태섭 감독이 이끌고 있는 한국 남자핸드볼대표팀은 우리 시각으로 29일 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벌어진 제21회 남자핸드볼 세계선수권대회 최종 순위결정전 마케도니아와의 경기에서 31-32(전반전 14-14)로 아쉽게 패하며 12위를 기록하고 끝냈다.

 

키릴 라자로프를 보며 최고의 골잡이를 꿈꾸다!

 

마케도니아의 왼손잡이 라이트백 '키릴 라자로프', 그는 이번 대회 아홉 경기를 뛰면서 모두 92골을 성공시켰다. 7M 던지기 성공률도 매우 높은 편이다. 아직 결승전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득점왕을 일찌감치 예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거물급이다.

 

우리 선수들이 그의 명성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최태섭 감독은 상대 선수가 2분 퇴장을 당하지 않는 한 따로 수비를 붙이지 않았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마지막 경기였기에 선수들의 능력을 믿었다.

 

하지만 그의 왼손에서는 무려 15골이나 터져나왔다. 팀 득점의 절반 가까이를 혼자서 다 해결한 것이었다. 그를 막으려고 가운데 수비수들이 한꺼번에 달려나갈 경우 옆으로 던져줘 6M 지점에서 더 좋은 슛 기회를 만들 정도였다. 축구로 따지면 리오넬 메시(아르헨티나, FC 바르셀로나)가 떠오를 정도로 유연하고 정확한 골잡이 그 자체였다.

 

양쪽 구석 말고는 그가 휘젓지 못하는 곳은 없었다. 대개 피벗 플레이어들이 활약하는 6M 라인부터 7M, 9M 거리까지 그가 못 뚫는 벽은 없었다. 강일구, 박찬영 등 우리 문지기가 각도를 잡기 어려운 스텝슛과 비교적 체격 조건이 좋은 피벗 플레이어 박중규를 꼼짝 못하게 만들 정도로 비틀며 던지는 이중 점프슛도 놀라웠다.

 

승패를 떠나 키릴 라자로프의 몸놀림은 세대 교체를 이루고 있는 우리 선수들에게 큰 공부가 되었다. 특히, 그와 비슷한 역할을 맡고 있는 오윤석(레프트백)이나 새내기 이은호(라이트백)에게는 더없이 좋은 본보기가 된 셈이었다.

 

유럽 선수들을 상대한 경험이 거의 없었던 이은호에게는 더욱 의미 있는 경기가 되었다. 최태섭 감독의 배려 덕분에 베테랑 이재우(일본 다이도스틸) 대신 들어와 뛴 시간이 다른 경기보다 훨씬 많았고 골도 다섯 개(9M 중거리슛 3개, 속공 2개)나 터뜨렸다. 눈 앞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골잡이가 뛰어다닌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회였다.

 

새내기 이은호 말고도 센터백 자리에서 뛰며 중거리슛에 대한 자신감을 확실하게 느낀 정의경도 잊을 수 없는 세계선수권 경험을 했다. 대회 초반 예선 라운드에서는 점프슛이 상대 수비벽이나 문지기에게 걸릴 때마다 고개를 떨구며 자신감을 잃은 표정을 지었지만 본선 라운드에 올라와 난이도 높은 중거리슛을 성공시키며 공격 조율 능력까지 한층 끌어올리게 된 것이었다. 동갑내기로 활약하던 고경수(하나은행)와 정수영(HC 경남코로사)이 있었다면 더 훌륭한 앙상블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너무 진하게 남기는 했다.

 

게다가 대학생 출신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주전으로 활약한 왼쪽 날개 겸 센터백 심재복(한국체대)의 탄력 넘치는 몸놀림까지 보태면 이번 대회를 앞두고 목표로 삼았던 '세대 교체'의 꿈은 거의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

 

지난 23일 예선 라운드 B그룹 마지막 경기에서 스페인을 24-23으로 물리치고 본선 라운드 진출을 확정지었을 때의 감격을 생각하면 제2의 '우생순' 역사를 이미 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들은 먼 길을 돌아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또 하나 큰 대회를 준비해야 한다. 다음 달 8일부터 막을 올리는 2009 핸드볼큰잔치(~ 3.1까지)가 코 앞에 닥쳤기 때문이다. TV 화면으로 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박진감 넘치는 이들의 화려한 몸놀림이 잠실학생체육관부터 시작하여 부천과 대구를 거쳐 성남실내체육관에서 반가운 봄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 제21회 남자핸드볼 세계선수권대회 11-12위 순위결정전 결과, 29일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 마케도니아 32-31(전반 14-14) 한국

◎ 한국 선수들 선방/득점 기록
문지기 박찬영 선방 11/29개(방어율 38%), 강일구 선방 5/19개(방어율 26%)
정의경 7골, 심재복 6골, 박중규 2골, 박찬용 3골, 오윤석 1골, 유동근 3골, 윤시열 2골, 이은호 5골, 이재우 2골

2009.01.30 08:40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 제21회 남자핸드볼 세계선수권대회 11-12위 순위결정전 결과, 29일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 마케도니아 32-31(전반 14-14) 한국

◎ 한국 선수들 선방/득점 기록
문지기 박찬영 선방 11/29개(방어율 38%), 강일구 선방 5/19개(방어율 26%)
정의경 7골, 심재복 6골, 박중규 2골, 박찬용 3골, 오윤석 1골, 유동근 3골, 윤시열 2골, 이은호 5골, 이재우 2골
이은호 정의경 심재복 핸드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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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대인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합니다. 축구 이야기,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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