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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하고도 두 해가 더 지났을 만큼, 아주 오래 전 그는 '저 세상'으로 아니 '하늘'로 떠나갔다.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진 이들은 언젠가 그와 다시 만날 날이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럼에도 그가 '지금 이 곳'에 없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같은 흙을 먹고 살진 않았어도, 1996년에 예순 네 해라는 다소 짧은 듯 보이는 생을 정리하고 떠나가기까지 그는 항상 흙냄새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흙냄새를 풍긴다, 그것은 곧 사람 냄새가 난다는 말이다. 사람 냄새가 난다, 그것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행복 수준과 쌍벽을 이루는 꼭 그만큼의 슬픔, 고통이 함께 이 세상 위에 있음을 안다는 말이다.

그 어떤 저서보다 가장 깊은 ‘상처’를 이 땅에 남긴 <상처 입은 치유자>를 지은 헨리 나우웬(1932~1996, 가톨릭 예수회 사제이자 심리학자). 그를 읽는다는 것은 이렇듯 사람 사는 냄새, 흙냄새를 미치도록 흠뻑 맡는 일이다.

일부러 상처 입고 싶은 맘 없다, 그러나 그 상처를 지울 필요도 없다

겉그림. 예수회 사제이자 심리학자였던 헨리 나우웬 지음.
▲ <상처 입은 치유자> 겉그림. 예수회 사제이자 심리학자였던 헨리 나우웬 지음.
ⓒ 민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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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래되었다. 그가 떠난 지도 오래되었고, 그가 남긴 책들 중 '불멸' 목록에 오를 만한 <상처입은 치유자>를 거듭 읽어 본 것도 역시 참 오래되었다.

영어로 'Wounded Healer', 우리말로 '상처 입은 치유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상처'가 무엇이며, '상처 입은 치유자'는 또 무엇인가. 어리석은 질문인 듯하나, 왜 '확실한 치료술을 가진 치유자'나 '든든한 치료비를 준비한 치유자'라 하지 않았는지 내심 묻고도 싶었다.

그러니까, 헨리 나우웬은 왜 치유자가 치유하려는 대상과 동등하거나 심지어 낮은 자리에 있기를 바랐을까를 묻고 있는 게다. 자신도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길 바랐던 그는, 세상을 어찌 보았을까. 그것을 아는 것이, 이 책을 다시 마음에 담는 데 필요한 첫 걸음이 될 듯하다.

"왜 인간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공부를 하고 경력을 쌓아가야 합니까? 왜 인간은 새로운 과학 기술을 개발해야 하고, 새로운 기관을 설립해야 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발해야 합니까? 인간이 노력한 결과의 가치가 미래에 보장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면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핵 인간에게는 창조적 삶을 사는 데 필수적인 연속 의식(a sense of continuity)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핵 인간은 자신을 비역사의 일부로 여겨, '지금 여기(the here and now)'라는 바로 그 순간만을 중요시합니다."(이 책, 20)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가 아니라 '언제든 세상은 변한다'고 해야 할 요즘 시대에 나우웬의 시대 인식은 그리 녹슬지 않아 보인다.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고백과 그의 구원에 대한 의지를 잠시 비껴놓더라도, '창조'에 담긴 '본래 아름답고, 본래 영원하던 것'에 대한 소망은 그래서 여전히 짙게 배어난다.

나우웬은 현대인이라고 일컫는 이들을 ‘핵 인간’이라 부르고 그들이 사는 시대를 '단절된 세상'-1장 '단절된 세상에서의 사역'-이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에 과감히 자신을 집어넣을 사역자를 찾는다. 물론, 이 시대를 이겨낼 힘은 사역자 자신이 아닌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그렇지만, 시대가 지닌 ‘그림자’와 ‘상처’에 응답할 자를 하나님이 찾아 부르신다는 점 역시 기억해야 한다.

'단절된 세상'은 곧 '뿌리 없는 세대'(2장 '뿌리 없는 세대를 위한 사역') 내부를 깊숙이 들여다보는 일로 연결된다. 또한, '뿌리 없는 세대'가 낳는 '소망 없는 사람'(3장 '소망 없는 사람을 위한 사역')들 앞에 선 사역자는, 그 세대와 사람들이 지닌 속사정(!)들을 솔직하고도 담담하게 정면 대응할 것을 요구받는다.

사실 이쯤에서, 기독교 의미가 진하게 녹아있는 '사역자'에 대하여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머리말' 끝 부분을 읊어보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다. 여기서 나우웬은 사역자가 어떤 인물인지를 드러내주며 더불어 이 책의 제목에 담긴 그의 마음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고통을 통해 얻은 상처가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원천으로 이용되는 방법을 사역자가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사역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을 '상처 입은 치유자'로 정했습니다."(이 책, ‘머리말’, 11)

"어떻게 상처가 치유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까?"

나우웬은 결국 이것을 묻고 싶었다. 상처가 치유의 원천이 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며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그리고 그는 이러한 치유 과정을 '환대'라는 말로 바꾸어 불렀으며, 그 안에 담긴 뜻으로 집중(concentration)과 공동체(community)을 제시했다. 물론, 치유 과정 전반을 일컫는 ‘환대’에 담긴 뜻은 푸석푸석한 이론이 아니라 실천해야 할 것이다.

이제 나는 '환대'(歡待, hospitality)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전통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을 뿐 아니라,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상태에 대한 반응이 본질적으로 어떠해야 하는지 좀더 깊은 통찰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
환대가 치유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주인이 자신의 집에서 편안함을 느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주인은 예상치 못했던 방문자가 두려움 없이 편히 쉴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환대에는 두 가지, 즉 집중(concentration)과 공동체(community)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이 책, 119~120)

나우웬은 그랬을 것이다. 이 땅에서 숨 쉬며 살아가는 이들을 '섬기려는 자'는 '상처를 입은 사역자'일 필요가 있다고. 그는 또 말했을 것이다. '상처'가 '환대'라는 방법을 통해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비추어 줄 때, 거기서 '사역자'는 진실한 공동체 구성원이며 목자요, 비로소 신실한 사역자가 될 수 있다고.

지금 우리 시대에서도 흙냄새 짙게 나는 사람다운 (기독교) 사역자가 그립다. 그런 사역자의 마음은 (영원함과 기쁨이 넘치는) '하늘'을 듬뿍 담고 있으면서도 분명 (죽음과 슬픔에 약한) '땅'을 참 많이 닮았으리라.

"사역이란 인간의 상태를 직시하는 섬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불멸과 온전성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사역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고 깨어진 존재이며, 이런 인간의 상태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해방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상기하게 됩니다.
(…)
그러므로 기독교 공동체가 치유의 공동체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곳에서 상처가 치료되고 아픔이 경감되어서가 아니라 상처와 아픔이 새로운 비전을 위한 출구나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고백할 때 서로의 소망이 깊어지며, 서로의 나약함을 공유할 때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힘을 기억하게 됩니다.(이 책, 125~126)

<상처 입은 치유자>를 읽는다는 것은 나우웬을 읽는 것이며, 나우웬을 읽는다는 것은 '상처 입은 치유자'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는 것이다. 적어도 내겐 그러하다.

'상처 입은 치유자'의 의미를 되새김질한다는 것은 나만이 지닌 '상처'를 정면으로 대응하는 쓰라린 일이며, 내 '상처'를 고스란히 정면 대응한다는 것은 곧 다른 이의 '상처'를 대면하기 위해 나 자신을 되새김질하는 일이기도 하다. 지금 나는 나를 읽고 있는 게다.

굶어본 자가 풍성한 식탁과 빈약한 식탁 사이에 놓인 '간격'을 이해할 수 있다. 맞아본 자가 때릴 수 있는 위치와 맞는 위치 사이에 놓인 '거리'를 가늠할 수 있다. '죽을 뻔 한 자'가 삶과 죽음를 갈라놓은 차이를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상처'란 굳이 스스로 끌어들일 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그 자체로 나쁘지 않다. 때에 따라서 '상처'는 상처들로 도배되다시피 한 세상을 들어가는 '패스워드'일 수 있고 뒷배경 같은 '그림자'들 삶에 참여할 수 있는 '아이디'가 될 수도 있다.

나누기 힘든 부와 권력의 특성상, 세상에는 '가진 자'보다는 '빼앗긴 자'가 늘 더 많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개인 '상처'를 훌쩍 뛰어넘는 사회 '상처'들이 빠르게 쌓여간다. 또한, 그럴수록 '상처 입은 치유자'는 귀하고도 꼭 필요한 존재가 된다.

다양한 삶과 다양한 배경이 뒤섞이면서 세상은 수많은 '상처'들로 그득하다. 그 누구도 사실상 '상처' 없는 이는 없다. 그 사이에서 어떤 이는 '상처 입은 사역자'가 되어 세상에 의미있는 목소리를 낼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상처에 눌린 피해자'가 되어 세상을 떠돌지 모른다.

지금 이 시대를 무어라 이름 붙이든, 갈수록 빨라지고 복잡해져 그만큼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상처'가 숨 막히는 속도로 쌓여갈 때 어딘가에서는 당신의 '상처'를 자기 것과 같다는 듯이 반가워할지 모른다. 나우웬이 이 책을 지을 때보다 세상은 더 발전했고 그만큼 오히려 더욱 혼란한 모습으로 변하기도 했다. 그만큼 당신이 지닌 '상처'도 세상 어딘가에서 귀한 역할을 할 기회를 마주하게 될지 모른다.

바로 오늘 어디선가, '상처'가 '치유'와 맞닿아 있지 않은지 조심스레 살펴보자.

덧붙이는 글 | <상처 입은 치유자> 헨리 나우웬 지음. 최원준 옮김. 두란노, 1999.
The Wounded Healer by Henri J. M. Nouwen



상처입은 치유자

헨리 나우웬 지음, 최원준 옮김, 두란노(2011)


태그:#헨리 나우웬, #상처 입은 치유자,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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