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블랙 블랙의 한장면

▲ 영화블랙 블랙의 한장면 ⓒ 유니코리아


영화 <블랙>은 인도판 헬렌 켈러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보고나서 대다수 관객들은 곽진성 기자처럼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중복장애인 미셀이 장애극복 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나 또한 휠체어 타는 장애인이지만 감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렇게 미셀 같은 중복장애인의 생애를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까, 란 안타까움이 더 크게 와 닿았다.

<블랙>은 미국에서 1880~1968년까지 살다간 너무도 유명한 헬렌 켈러의 삶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영화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미 미국에서 1962년에 <미라클 워커>란 이름으로 영화화 됐었고 최근 개봉한 <블랙>은 인물들의 이름과 배경 등을 인도로 바꾼 <미라클 워커>의 인도판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영화들이 실제모델인 헬렌 켈러의 생애를 제대로 조명했다고 할 수 있을까? 나의 대답은 거의 NO라고 할 수 있다. <미라클 워커>나 <블랙>에서 이야기 주인공은 엄연히 중복 장애인인 헬렌 켈러와 미셀이지만 이들을 제쳐두고 이들을 가르쳤던 선생들의 관점에서 서서 인간의 다양한 면은 외면한 채 오로지 장애 극복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미라클워커 미라클워커의 포스터

▲ 영화 미라클워커 미라클워커의 포스터 ⓒ MGM


미국에서 만들어진 <미라클 워커>는 7살 헬렌 켈러가 선생인 설리반을 만나 처음으로 글을 깨우치게 되는 약 두 달간의 기간만을 다루고 있는데 반해, 인도에서 만든 <블랙>은 7살 미셀이 샤하이 선생을 만나 그의 도움을 받아 대학을 12년 만에 졸업하는 30년 정도를 그리고 있다.

<블랙>은 전작인 <미라클 워커>에서  헬렌 켈러가 설리반 선생을 만나 글을 처음으로 배우게 되는 두 달간 만을 보여주고 끝난 아쉬움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이 미셀의 30대까지도 조명하고 있는 점은 좋은 발상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블랙의 감독은 헬렌 켈러의 인도판 아류작을 만들면서 헬렌 켈러가 직접 쓴 자서전도 안 읽어본 듯 전작인 <미라클 워커>의 세계에서 한 발자욱도 벗어나지 못했다

첫째 이들 영화의 감독들은 헬렌 켈러과 미셀이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어둠의 세계에 갇혀서 짐승처럼 불쌍하게만 살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미라클 워커>에서는 헬렌 켈러의 이런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7살 헬렌 켈러가 식탁을 뒤엎고, 또래아이를 때리고 , 집안을 엉망으로 만드는 등의 장면을 무려 수십 분이 넘도록 보여주고 또 보여준다. <블랙>에서는 한술 더 떠서 7살 무렵 미셀은 가족들이 미셀의 움직임을 알 수 있도록 깡통들을 허리에 매단 채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었다.

이런 장면은 관객들에게 헬렌 켈러나 미셀 같은 중복장애인에 대한 이미지를 곽진성 기자처럼 갖게 만든다.

 "영화를 보면서 필자는 미셸의 막막함을 생각해 봤다. 살아 있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어둠 상태인 그의 운명이 너무 기구하다고 생각해다. 작은 장애로도 살기 힘든 이 세상에서 미셸에게 닥친 불행의 크기는 너무 커 보였다. 저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오마이뉴스> 9월 14일 '장애란 어둠을 뚫고 찬란한 기적을 맛보다' 중에서)

곽진성 기자의 말처럼 헬렌 켈러 같은 중복 장애인들은 실제로도 설리반 같은 스승을 만나기 전까지는 어둠의 세계에 갇힌 짐승처럼만 살아갈까? 휠체어를 타며 장애인단체나 모임 등에서 많은 장애인을 만나는 필자지만  헬렌 켈러 같은 중복장애인은 아직 보지 못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세계적으로도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그럼 유일한 증거랄 수 있는 헬렌 켈러가 22살에 직접 쓴 자서전에서 설리반 선생을 만나기 전인 5세 때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우리집 요리사의 딸인 같은 또래의 아이와 내가 만들어낸 수신호와 몸짓언어로 소통하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으며 밀가루반죽 놀이를 하고 같이 아이스크림을 만들고 닭과 칠면조 모이도 주었다. 크리스마스가 오면 항상 즐거웠고 방에 긴 양말도 걸어 두었다. 꽃들이 피기 시작하면 꽃 사이로 뛰어 다니는 게 얼마나 즐겁던지 구석구석 쏘다니는 사이 흐드러지게 핀 꽃이 삭막하기만 했던 여름 집을 뒤덮고 정원을 가득 채웠단 것을 문득 깨달았다."

이렇듯 헬렌은 중복 장애의 어려움 속에도 여느 보통 아이들처럼 다양한 경험과 놀이를 하며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블랙>에서의 미셀은 샤하이 선생에게만 의지해 둘만이 거의 20년을 보낸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실제 헬렌 켈러는 사람들의 그런 억측을 미리 알기라도 한 듯 자서전에서 "제가 중복장애인이기 때문에 방에서 책 읽는 것 말고는 당최 낙이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보이시죠? 천만에요 나는 그야말로 곳곳에서 다양한 기쁨과 즐거움을 찾는 사람입니다. 특히나 야외 활동을 좋아해서 수영은 이미 어린 시절에 배웠고요, 보트놀이를 할 때면 늘 노를 젓는 것을 담당했고요, 친구들과 같이 보트경주에도 참가하곤 했답니다. 친구들과 카드놀이 체스게임도 자주 즐겼고 박물관이나 미술관 관람은 언제나 즐거운 시간이었답니다. 그리고 유명한 배우나 시인 학자들과도 많은 교류를 주고받았죠."

이렇듯 실제 헬렌 켈러는 설리반 선생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지속적인 교류를 해왔으며 보통 사람들처럼 다양한 취미활동도 즐기며 살아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블랙>에서의 미셀은 같은 장애인이고 부유한 상류층이며 대학생활도 무려 12년 동안이나 했었는데 그동안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친하게 지낸 사람이 샤하이 선생 한 명 뿐이라는 것은 어디로 보나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영화 블랙 블랙의 포스터

▲ 영화 블랙 블랙의 포스터 ⓒ 유니코리아


그렇다면 <블랙>이나 <미라클 워커>에서 공히 보이는, 식탁을 뒤엎고 인형이나 집기를 깨부수고 친구를 폭행하는 헬렌과 미셀의 거칠고 험한 행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두 영화에서는 이들의 이런 모습이 단순히 욕구불만과 다른 사람과 소통을 할 줄 몰라서라고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헬렌 켈러는 자서전에서 이때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이가 먹어가며 의사 표시욕구는 점차 높아 가는데 내가 만들어서 그간 사용해온 몇몇 신호들이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효율적으로 못한다는 사실이 자주 드러났다. 그럴 때마다 상대방을 이해시키는데 실패한 나는 감정이 한 없이 폭발했다"라고 밝히고 있다.

즉 헬렌 켈러는 중복장애로 인해 처음부터 거칠고 험한 심성을 지녔던 것이 아니라 5세정도까지는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는데 차츰 성장하면서 소통해야할 내용과 방식이 많아지는데 장애 때문에 벽에 부딪치게 되면서 거칠게 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헬렌 켈러의 성장 과정과 심경의 변화 역시 두 영화에서 전혀 조명되지 않고 오직 어둠의 세계에 갇혀서 짐승처럼 불쌍하게만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며 단편적으로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블랙>이 전작인 <미라클 워커>와의 차별화를 위해 미셀의 30대까지 보여준 것은 좋은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블랙 제작진의 한계다. 제작진이 만일 대학에 들어가며 수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다양한 경험을 한 헬렌의 자서전을 제대로 읽고 비슷하게 만이라도 미셀의 삶을 묘사했더라면, 오직 헬렌의 장애에만 초점을 맞췄던 헐리우드 작품인 <미라클 워커>와 대비되는 인간의 다양성을 지닌 장애인 캐릭터를 탄생시켰을 것이고 관객들에게도 새로운 장애인의 이미지를 느끼게 해줬을 것이다.

하지만 <블랙>의 제작진은 헬렌 켈러의 아류작을 만들면서 헬렌 켈러가 직접 쓴 자서전도 읽어 보지 않은 듯 하며 전작인 <미라클 워커>의 단점을 제대로 분석하지도 못했다. 감독은 헬렌 켈러가 장애인이기 전에 삶의 다양성을 지닌 똑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너무도 쉽게 간과한 채 미셀의 장애만을 극도로 부각시켜 엄청난 장애를 지닌 소녀가 선생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장애를 극복했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겠다는 생각뿐이었던 것이다. 장애인을 조명하는 영화를 만드는 제작진이나 이를 비평하는 전문가들의 눈에 인간의 다양한 면은 보지 않고 오직 장애만을 바라보는 관행은 언제쯤에나 사라질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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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영화 헬렌 켈러 블랙 미라클 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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