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기자랑' 이소현 감독 휴먼 다큐멘터리 <장기자랑>의 이소현 감독이 11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단원고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장기자랑>은 세월호 참사를 겪은 일곱 명의 엄마들이 얼떨결에 연극을 시작하며 재능을 발견하고, 새로운 도전을 통해 아이들을 향한 기억을 이어가는 휴먼 다큐멘터리다. ⓒ 이정민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일까. 보는 사람의 시선과 가치관이 반영된 이 단어는 특히나 큰 비극을 겪은 피해자, 남은 유가족 입장에선 또하나의 폭력일 것이다. 올해 9주기를 앞둔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에게도 마찬가지 아닐까. 지난 5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장기자랑>은 여타 세월호 영화와 달리 남은 사람들을 오롯이 바라보고, 희생자들을 돌아보게 하는 일상성의 영화로 그 의미가 남다르다.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등학교에서 11일 저녁 특별한 행사를 준비했다. 참사를 겪은 가족으로 구성된 4.16 가족극단 '노란 리본'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의 공동체상영을 진행한 것. 단원고 학생 및 학부모, 그리고 영화 주인공들이 함께 영화를 보고 생각을 나누는 자리였다. 영화 상영에 앞서 이소현 감독을 만날 수 있었다(관련기사 : '세월호 엄마들' 위로한 단원고 학생들 "절대 잊지 않을게요" https://omn.kr/23hf5).
배수진을 치다
영화 완성 후 처음 찾는 학교였다. 이소현 감독은 "촬영 시작 때 5주기였는데 이 영화를 다 끝낼 때면 참사 진실규명이 돼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됐고, 또 다른 참사가 일어났다"며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학생들이 반겨줘서 놀랐다. 굉장히 밝고 긍정적인 영혼이 모여있는 곳임을 느꼈다"며 감사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영화의 시작은 우연이었다. 2019년 2월경 일본 NHK 다큐멘터리 사운드 스태프였던 이소현 감독은 유가족에게 참사 당시 끔찍한 기억을 건드리는 잔인한 질문이 오가는 걸 보고 큰 의문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이소현 감독은 "질문이 왜 이렇지? 생각하던 차에 제가 한국인이다 보니 (출연자였던) 애진 어머님께서 제게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더라"며 "다큐 찍는 게 싫다고 하시기에 제가 그런데 왜 출연을 결정하셨냐 하니 (참사가) 잊히는 게 두려워서라고 하셨다"고 말을 이었다.
"그 말을 듣고 출연자들이 고통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방법은 없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애진 어머님께서 연극을 하는데 보러오라면서 지나가는 말로 극단 홍보 영상을 맡겼는데 별로였다고 하셨다. 그 말에 제가 해드리겠다고 그래서 홍보 영상을 찍으러 갔는데 그때가 캐스팅 문제로 다툼이 났던 중이었다. 분위기가 좋지 않아 쫓겨나게 됐지. 하지만 전 잘 완성해 드리고 싶었다. 개별로 연습하시는 걸 묶어서 찍으면 되겠다 싶어 질문 두 개를 준비해갔는데 다들 절 붙잡고 두세 시간 얘기하는 걸 보고, 누가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정말 마음 속 얘길 하시는 것 같더라. 이걸 다큐로 찍으면 어떨까 생각하게 됐다."
짧은 홍보 영상이 다큐로 바뀌는 계기였다. 이소현 감독은 이보람 프로듀서를 비롯해 나름 영화, 연극 분야 등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있던 친구들을 모아 스태프를 꾸렸고 3년 6개월여 시간이 지나 지금의 영화가 나올 수 있었다. <장기자랑>이 특별한 점은 참사 희생자 하면 떠올리기 쉬운 피해자상을 제거하고 일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유쾌한 정서를 담아 제시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극단 어머님들이 서로 다투는 과정도 여과 없이 담은 이유다.
"그 다툼의 과정이 밉거나 한 게 아니라 귀엽고 재밌다고 느꼈다. 물론 실제 촬영 때 분위기가 살벌하긴 했지만, 그런 모습이 더 사람 같고 우리의 이웃 같다고 생각했었다. 다큐멘터리가 크게 두 종류인 것 같다. 처음부터 말하려는 포인트를 딱 잡아서 하는 게 있고, 우리처럼 마구 찍는 게 있다. 정말 쌍끌이 어선처럼 다 찍으러 다녔다. 어머님들 어디 간다고 하면 다 따라다녔다.
그렇게 1년 반을 찍으니 이야기가 보이더라. 중년 여성이 우연히 연극을 배우게 됐고, 캐스팅으로 싸우다가 못하겠다며 박차고 나가는데 1년에 100회 이상 공연하면서 돈 한 푼도 안 받으시면서 왜 이렇게 열정적일까. 이 엄마들이 목숨 거는 연극엔 아이들이 담겨 있고, 무대에서 직접 아이가 되는 걸 경험하기 때문이었다."
▲ '장기자랑' 단원고 특별상영회 휴먼 다큐멘터리 <장기자랑> 특별 상영회가 11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단원고에서 열리고 있다. <장기자랑>은 세월호 참사를 겪은 일곱 명의 엄마들이 얼떨결에 연극을 시작하며 재능을 발견하고, 새로운 도전을 통해 아이들을 향한 기억을 이어가는 휴먼 다큐멘터리다. ⓒ 이정민
엄마들을 주인공 삼은 다큐를 만들겠다고 마음을 다 잡았지만 신뢰를 얻는 과정이 순탄친 않았다. 국가정보원이 세월호 유가족을 사찰해 온 사실 등이 드러났고, 보수를 자처한 일부 시민들이 세월호 가족들을 향해 무분별한 비난을 퍼붓던 시기와 맞물리면서다.
"제가 마이크를 분장실에 뒀었는데 도청용으로 오해하기도 했고 MBC나 KBS도 아닌 소속이 불분명해서 염탐하러 온 게 아닌가 세월호가족협의회로부터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 때 손편지를 써서 어머니들을 찾아갔다. 저는 그냥 어머니들께 다큐멘터리를 선물로 드리고 싶었을 뿐인데 이렇게 불편하다면 보시는 앞에서 지금까지 촬영한 것들을 모두 지우도록 하겠다. 다큐멘터리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침 (연극을 지도한) 김태현 감독님이 어머님들께 공식적으로 설명하고 오해를 풀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촬영을 계속할 수 있었다."
참사 9주기, 올바르게 기억하기
영화엔 '노란 리본' 단원 엄마들이 캐스팅 문제로 반목하는 과정부터 화해하고 서로를 향해 솔직한 속내를 내보이는 장면까지 가감 없이 담겨 있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 사이에 각인된 피해자다움을 제거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자는 감독의 의도였다.
"참사현장을 보면 어쩔 수 없이 숙연해지고 고통스러운 건 사실인데 그렇게만 바라보면 잊고 싶은 기억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참사라는 건 누가 언제 어떻게 당할지 모르는 일이잖나. 내 이웃도, 나도 당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진실규명을 위해 싸우는 분들이 얼마나 큰 용기를 냈는지, 그 모습으로 기운이 날 수 있게 기억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근데 참 어려운 일이 뭐냐면 종종 사람들이 유가족 분들에게 자신이 무얼 할 수 있는지 물을 때다. 가족분들은 기억해달라고 얘기하신다. 누가 그 참사를 잊을 수 있을까. 그 뉴스를 본 사람들은 다 기억할 텐데 말이지. 개인적으론 그 기억만 가지고는 더 이상 안 된다는 생각이 있다. 어떻게 기억할지 자신만의 다짐이든 계획을 세워서 1년에 단 하루라도 행동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누군가의 약전을 읽든 구체적인 행동을 해야 하지 않나 싶다."
▲ '장기자랑' 단원고 특별 상영회 휴먼 다큐멘터리 <장기자랑>의 이소현 감독이 11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단원고에서 열린 휴먼 다큐멘터리 <장기자랑> 특별 상영회 관객과의 대화에서 출연진인 순범 엄마(최지영)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관<장기자랑>은 세월호 참사를 겪은 일곱 명의 엄마들이 얼떨결에 연극을 시작하며 재능을 발견하고, 새로운 도전을 통해 아이들을 향한 기억을 이어가는 휴먼 다큐멘터리다. ⓒ 이정민
영화를 완성한 뒤 학생들의 모교에서 상영하는 것도 감독과 엄마들 입장에서 분명 특별한 일일 것이다. 이소현 감독은 "단원고에서 어머님들이 연극을 했을 때도 몇 차례 무산되는 과정이 있었다. 그때 학교 선생님들이 도와주셔서 무사히 공연을 할 수 있었다"며 "영화가 완성되면 꼭 학교에서 틀고 싶다고 해주셔서 사실 개봉 초반이지만 단원고에서만큼은 상영하자고 배급사랑도 얘기가 잘 됐다"고 전했다.
인터뷰 말미 다른 엄마들과 달리 생계 문제로 홍보에 함께 하지 못하고 있는 애진 엄마 역의 김순덕씨를 언급했다. "생존학생의 어머님인데 남편분께선 직장을 관두시고 참사 진실 규명 활동을 하고 계신데 생계가 어려워지셔서 다른 어머님들과 같이 영화 행사에 못 오고 계신다"며 감독은 "단원고가 특별한 장소라 꼭 오셨으면 했는데 역시나 생계 문제로 일하시느라 참여 못하셨다. 꼭 같이 이야기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