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마음이>로 데뷔한 이후 김향기가 벌써 13년차다. 그의 필모그래피 자체가 하나의 성장앨범인 셈이다. ⓒ 이정민
기억은 곧 망각에 대한 저항이다. 아픈 기억일수록 사람들은 잊으려 하고, 애써 꺼내놓지 않는다. 하물며 시대적 아픔을 온몸으로 떠안은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우리가 아는 몇 가지 역사적 비극 중, 일제강점기 때 위안부 피해자 분들의 아픔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사과 없는 보상이 아무의미 없다 외쳐도 일본은, 심지어 우리 정부마저 외면하려 든다. 그래서 더 아픈 피해자들을 18세의 한 배우가 온 몸으로 담아냈다. 영화 <눈길>에서 종분 역을 맡은 김향기다. 이미 2015년 TV드라마로 방영된 <눈길>이 오는 3월 1일 정식 극장 개봉을 앞두고 있다. 지난 21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향기가 달고 나온 나비 브로치가 유독 눈에 띄었다.
담담한 서술
가난한 환경이지만 성격만큼은 당차고 밝았던 종분은 <눈길>의 전체를 꿰뚫는 피해자이자 관찰자기도 하다. 자신과 함께 위안부로 끌려온 영애(김새론 분)의 하나밖에 없는 친구기도 하다. 영화 자체는 당시 벌어졌던 가학적 사건을 애써 묘사하지 않고 대신 소녀들의 정서 변화와 귀향 과정에 집중한다. 어쩌면 그래서 당시 피해자들의 아픔을 표현하기가 두 배우로선 더 어려운 과제였을지 모른다.
연출을 맡은 이나영 감독은 김향기에게 목화솜 꽃을 선물했다. 극중 종분의 엄마(장영남 분)가 영애네 집에 품삯을 받는 매개기도 하다. "지금도 그 목화솜이 집 피아노 위에 놓여 있다"며 김향기는 눈빛을 밝혔다.
▲ 영화 <눈길>의 한 장면. 가난하지만 씩씩한 종분(김향기 분)과 부유하지만 차분한 영애(김새론 분)는 일제 만행의 희생자가 되고만다. ⓒ 엣나인필름
"표현해내기 어려울 테지만 한 분이라도 그 사실을 깨우치고 잊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피해자 할머님들이 살아계시고, 증언 인터뷰 영상이 남아 있잖아요. 그걸 보면서 저 역시 잘 해야겠다. 그래서 그 분들께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으면 했어요. 사실 걱정 많이 했어요. 워낙 예민한 부분이라 어렵고 무서울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부담도 있었는데 시나리오가 너무 마음에 닿았어요. 충격적인 장면이 없는데도 와 닿는 게 더 좋더라고요. 마음에 더 깊이 새겨진달까.
촬영 전까지 여러 자료를 찾아보잖아요. 정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아픔이라는 걸 깨닫고 충격받기도 했어요. 더 책임감이 생겼죠. 현재 살아계시고 피해자임을 밝힌 분도 계시지만 훨씬 많은 분들이 침묵 속에서 고통 받았다는 걸 알았죠. 최대 40만 명이라고 하니, 제가 알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괴로워하셨을 거예요."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거나 위안부 문제에 특별한 의식이 없었다지만 김향기는 촬영 결정 이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적극적으로 피해자 분들에 대한 연대 의지를 몸으로 실천하고 있다. 이미 <눈길>을 찍어둔 상태였기에 그 후에 나온 <귀향>을 개봉하자마자 찾아서 봤고, 위안부 피해자 관련 기사는 닥치는 대로 읽었다. 학교에선 친구들에게 할머님들이 만든 액세서리 등을 같이 구입하며 나누기도 했다.
"제가 설득한 건 아니고 고맙게도 친구들이 관심을 가져주었어요. 할머님들께 기부할 수 있는 물건을 이미 구매하던 친구도 있었고요. 아무래도 친구들은 제가 작품을 하면 어떤 내용인지를 알게 되잖아요. 자연스럽게 그런 사이트를 알게 됐고, 선뜻 함께 해준 거죠. <귀향>은 제가 외할머니와 같이 봤어요. <눈길>과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됐지만 같은 감정을 다루고 있잖아요. 또 그때 상영관을 잡기위해 노력하는 걸 알고 있었고, 많은 분들이 도움의 손길을 건네 준 작품이라 관심이 많이 갔었어요."
연기의 재료들
수줍어하면서도 질문에 내놓는 답은 꽤 깊다. 그만큼 평소 생각하는 습관이 들어있다는 반증이다. 여섯 살에 처음 연기를 시작해 올해로 벌써 13년 차인 그 경력 덕일까. 사실 김향기는 빵, 휴대폰, 가전제품, 심지어 아파트 광고에까지 출연했던 풍부한 경험의 소유자다. '아역 트로이카' 수식어가 빠지지 않았고, 현장에서 감독의 사인과 동시에 눈물을 흘려 주위를 놀라게 했던 일화는 영화계에서 이미 유명하다.
신체적으론 사춘기를 지나고 있다. "연기하면서 사춘기를 잘 넘긴 거 같다"며 그가 웃어보였다. 물리적으로 바빠 방황할 틈이 없었다는 뜻인데 혹여나 밀려드는 일로 연기적 사춘기를 겪진 않았을지 궁금했다.
"제가 <마음이>로 시작했잖아요. 그때 뚜렷이는 아니고 60프로 정도 기억이 나요. 광고만 찍다가 운 좋게 오디션을 보게 됐고, 감독님이 마음에 들어 하셨는데요. 아무래도 첫 걸음이니 제게 소중한 작품이죠. 어려서 그땐 많이 몰랐어요. 엄마가 대본 읽어주면 그대로 감정이입하고 그랬어요. 아마 우리 또래면 다 연기에 대한 부담은 있을 거예요. 힘들기도 했을 거고. 근데 이미 선택한 이상 스스로 이겨내야죠.
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해요. 작품 들어가기 전까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데 일단 들어가면 긍정적이 돼요. 좋아하는 일이니까요. 집에 있을 땐 빵 만들면서 기분을 전환하기도 해요. 일단 지금은 연기하는 게 너무 좋아요. 물론 힘들 때가 있고, 실패할 때도 있잖아요. 근데 모든 직업이 다 그렇겠지만 전 그런 거조차 연기에 필요한 일들이라 생각해요."
"언제부터 연기자가 돼야겠다 결심한 계기는 없다"고 말했지만 김향기는 자연스럽게 지금 가는 길의 소중함과 즐거움을 알아왔다. 어려움 또한 좋은 연기를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 생각한다니. 그는 진짜 잘 준비된 배우일지도 모른다.
▲ <눈길>을 찍은 이후 김향기는 위안부 피해자 분들 관련기사는 모조리 읽고 있었다. 그만큼 진심으로 인물을 대하는 그 마음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 이정민
"(웃음) 집에서 엄마나 할머니도 그 얘기해요. '너 진짜 연기 안 했으면 큰 일 날뻔했다'라고요. 영화를 보거나 책을 보다보면 지루할 때가 있는데 현장에 일단 나가면 제가 대기하고 있더라도 전혀 지루하지 않더라고요. 만약 연기를 안 했다면요? 음, 공부를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요!"
김향기의 차기작은 <신과 함께>다. 장장 8개월 넘게 이어지고 있는 촬영에서 그는 특유의 긍정 기운을 놓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