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동일방직 해고자 안순애와 김미례감독<열 개의 우물> 촬영 중에
박상환
"나는 투사가 아니다, 지금은 농사꾼이다. 내가 이념이나 사상이나 목적의식이 투철해서 노동운동한 게 아니다. 그땐 잘 모르면서도 그냥 했다. 살아야 되니까, 살려고 했다.
뒤를 돌아보면 늘 낭떠러지였다." (안순애)
안순애는 낭떠러지 같은 노동운동에서 물러나 농촌으로 도망쳐 30년을 살았다. 동네 할머니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아 마을 이장도 두 번이나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그래서 여성농민운동을 했다. 안순애의 이야기를 듣다가 '각자의 삶에 곧장 말을 건네는 페미니즘'(벨훅스)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결혼하기 싫은 남자의 집에서 달아나 자신이 선택한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할머니는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토지에 대한 소유권과 접근권을 박탈당한다고 느끼자 그에 대해 거부했고, 항의했고, 나서서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할머니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던 것은 아닙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창비, 2016, 51쪽)
개봉 전에 여러 곳에서 후원 상영회를 했는데, 그중에서도 김현숙이 사는 강화와 안순애가 사는 음성 두 곳에서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려고 한다.
날이 좋고 바람이 선선했던 지난해 어느 가을 밤, 강화 큰나무 카페에서 <열 개의 우물>은 첫 관객들을 만났다. 출연진 중 한 명인 '국자와 주걱' 책방지기 김현숙이 애써준 덕분에 마련된 자리였다. 연휴 기간인데도 상영 공간은 동네 사람들로 가득했다. 팝콘 대신 누군가 가져온 풋대추 한 바구니를 함께 나눠 먹었다.
이 동네에서 함께 살아가는 발달장애인 청년이 여럿 와 주었는데, 다큐가 상영되는 동안 화면 앞으로 지나가거나 갑자기 일어나 서성이며 화면을 가려도 누구 하나 불평하는 이웃이 없었다. 상영 후에 짧은 GV(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했는데, 엔딩으로 나왔던 단편선의 노래를 '한 번 더' 틀어달라는 청년도 있었고, 그에게 영화를 본 소감을 나눠 달라고 했더니, 시간차를 두고 "조..아...요..오오오"라는 답이 돌아왔다.
강화에서 태어나 지금껏 농사를 짓고 살아왔다는 관객은 다큐를 보고 "땅 위에선 보이지 않는 미세한 뿌리들이 나무를 지탱하는 것처럼 이 영화는 바닥의 힘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했다. "영화에 왜 여자들만 나오냐, 남자들은 한 명도 안 나오는데, 일부러 뺀 거냐"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국자와 주걱'에서 북 스테이를 하던 기후위기 활동가들도 왔는데, 동일방직 사건이나 당시의 탁아운동의 역사적 맥락을 알게 되었고, 지금의 페미니즘 운동 속에서 지난 운동들을 고민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나눠주었다.
내가 구사하는 언어들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삶들이, 몇 십 년 전 누군가 고군분투하며 살아낸 세계가, 자그마한 후원 상영회에 발걸음을 옮겨준 이들의 말로 그 윤곽을 울룩불룩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누구와 어디서 함께 영화를 보는지에 따라 마음을 치고 들어오는 대사가 달라지고, 익숙했던 장면이 생경해 진다는 것을 실감한 날이었다.
안순애가 사는 음성에서 가까운 생극의 작은 소극장 '하다'에서 마을 주민 사십 여 분들과 함께 했던 후원 상영회도 기억에 남아있다. 상영회가 끝나고 이어진 GV에서 출연진 중 한 사람인 안순애는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나 여성농민운동 최전선에서 함께 싸워낸 이들이 아닌, 지금 음성 소이면에서 자신과 함께 수박 농사를 짓는 마을 할머니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이 영화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닌 꿈을 함께 꾸었던' 시공간을 담아 내고 있기에 안순애의 호명은 적어도 내겐 너무나 소중한 순간으로 다가왔다.
"싸워온 게 아니고 살아온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