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딸에 대하여> 스틸컷
찬란
그 용기 덕에 얼마 전 한 사업장 노동조합 간부들과 취중논쟁을 벌였다. 젊은 남성 조합원 일색으로 여성도 장애인도 없는 사업장에서 그들은 노동조합의 사회성, 연대와 기여의 소중함을 놓치지 않으려고 해마다 조합원 교육에 대단한 공을 들인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애틋하고 자랑스럽지만 안타까운 마음에 했던 말이 싸움이 됐다.
"회사에 여자를 뽑아요. 일상에 다양성이 있으면 그렇게 맨날 맨바닥에서부터 연대를 고민할 필요가 없지."
진심이다. 일상에 '나와는 다른' 누군가가 있으면 세상 보는 눈도 달라진다. 제조업 유노조 킹산직 젊은 남자로 이뤄진 '효율적 생산 집단'이 어떻겠는가. 공장 밖의 수많은 다른 노동자들을 생각할 계기가 있겠는가. 그저 높이고 지키고 싶은 마음을 잘못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가족임금을 위해 높이고 지키는 동안 자기 주변의 여성들에게 '개인적으로' 맡겨놓은 돌봄이란 필수 노동을 직면하는 것이 얼마나 두렵겠는가. 여성과 장애인이 있는 사업장과 없는 사업장은 이런 문제를 바라보는 생각의 출발선이 다르다.
"그럼 없어진 여자 화장실부터 다시 지어야 하고, 현장에서 관계에 문제가 생기고, 여자가 하기 힘든 일이고, 골치가 아프고" 등으로 시작해 온갖 공방이 오가다가 "그래 니네끼리 좋은 직장 다니면서 마누라 애새끼 건사해가며 잘 먹고 잘살아라 이 가부장들아! 이 멸종 위기종들아!"라는 말까지 하고 말았다(앗, 물론 아무한테나 이러면 안 된다. 큰일 난다. 서로 잘 알고, 그들의 선한 마음을 끊임없이 봤으니까 했다. 이미 '남성적 일자리'가 되어 여성을 다 밀어낸 현장을 반대로 바꾸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1).
아마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매년 그랬듯 그들의 소중한 노력에 감동하고 현상 유지를 위한 교육 준비에 최선을 다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성 직군(내부노동시장)-여성 직군(외부노동시장)'의 양극단 중 가장 좋은 쪽 가까이 있는 동료들의 삶이 이제는 위험해 보인다. 다른 쪽 끝 가까이의 엄마와 딸들은 이런 세상에 살 수가 없는데, 우리는 보호시설에서 사랑받는 푸바오처럼 이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좋은 노동조합'의 '가족임금 받는 가부장'이라는 멸종 위기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자이언트판다는 인공번식 노력으로 멸종 취약종으로 겨우 바뀌었다는데, 좋은 노동조합을 지키고 더 많이 만드는 게 그런 인공번식 수준에 그친다면 그게 다 뭔가. 이 사회를 위해서나 애틋한 그 노동조합을 위해서나 돌봄의 기쁨과 성찰 가능성을 빼앗긴 나의 젊은 동료들을 위해서도 그게 다 뭔가. 노동조합이란 게 자연에서처럼 다양하게 어울려 살며 번성하지 못하면 보편권리를 위한 집단이 아니라 특수계층 메이커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돼서 뭐하겠는가. 영화 속 그 여자들과 내 소중한 남자들 삶의 간극이 '천문학적으로' 먼 것 같다. 아득하다.
40대 여자가 된 나에게도 돌봄은 두려움이다. '좋은 노동조합'을 가진 그들에게도 돈이 있어 조금 덜 걱정일 뿐 언젠가 개인이 직면하고 감당해야 할 두려움일 것이다. 생산/재생산이 각기 성별 직군으로 파편화된 불안정하고 불평등한 사회에서 우리는 우리 삶의 저변인 돌봄 노동을 생각하기를 일단 접어두고 있다. 그런 우리 동료들과 지금 바로 이 영화를 함께하고 싶다. 이 영화야말로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충격과 용기를 모두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날이 올까?
1) 한편 "어떤 일자리가 '남성적 일자리'라 할 때 처음부터 남성이 유입되어 안정화되었는가, 아니면 안정적 일자리였기 때문에 남성이 유입되었는가 하는 점은 명확하지 않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다고 볼 수 있다. _이소진, 《시간을 빼앗긴 여자들》, (갈라파고스, 2021), 100." 참조, 이 사업장은 여성이 존재했으나 노동조합 설립 후 좋은 일자리가 되면서 서서히 여성들이 자연 소멸(정년)한 사업장이란 점에서 애초에 여성이 일할 수 없는 일자리였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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