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장면 갈무리
tvN
2차대전 종전 이후, 일본에 미 군정이 도입됨에 따라 오키나와 역시 미군의 통치를 받는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일본은 종전 7년 만에 미군정에서 벗어나 주권을 회복했지만, 한편으로 미국은 '미일안보조약'을 통해 오키나와에서만큼은 통치권을 더욱 강화한다. 이는 지리적으로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진영들과 인접한 요충지인 오키나와에 미군기지를 설립해 군사 거점화하려는 계획이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기지 건설을 위해 주민들의 토지를 강제로 몰수했고 저항하는 주민들을 수용소에 가두기도 했다. 많은 오키나와 주민들은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벼랑 끝에 몰렸다. 이후 일본 본토에 있던 미군 기지들까지 하나둘씩 오키나와로 이전하면서 그 규모는 더욱 확대된다.
미군 기지의 확장과 더불어 오키나와 일대에서 미군 관련 범죄와 각종 사건·사고도 급증했다. 1955년에는 가데나 공군 기지에서 오키나와인 소녀가 미군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해 시신이 유기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미군정의 통치를 받던 오키나와에서는 미군을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없었고, 범인은 본국 송환 이후 감형되어 솜방망이 처분에 그쳤다.
1960-70년대 들어 오키나와에서는 미군의 횡포로 인한 반미 감정이 확산되면서 일본 복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일본은 1960년대 들어 경제 부흥에 성공하여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정작 오키나와인들은 국적상 일본인이면서도 자국민으로의 권리와 보호를 받지 못하는데 불만이 팽배했다. 여기에 오키나와가 미군의 군사거점이 되면서 전쟁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된 것도 원인이었다.
미국도 일본과의 동맹 강화를 위한 이해관계가 일치하며 1972년 5월 15일, 약 27년 만에 오키나와의 일본 반환 결정이 내려진다. 하지만 또다시 오키나와인들이 뒤통수를 맞는 상황이 벌어진다. 미국은 오키나와를 반환하면서도 주일 미군 기지는 그대로 유지하기로 일본 정부와 합의했다. 또한 미국은 3조 2천억에 이르는 오키나와 반환 비용과 2조 원(추정)에 이르는 주일 미군 주둔 비용(2021년 기준)도 모두 일본 정부가 부담하는 밀약을 맺었다.
오키나와는 대규모 군사시설로 인해 기업유치가 어려운 지역으로 꼽히며 지역발전이 더뎠다. 지금까지도 일본에서 연간 소득 최저, 높은 청년 실업률이라는 오명과 함께 빈곤한 지역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 반환 이후로도 수십 년간 오키나와는 계속된 미군 범죄와 항공기 사고 등이 수백 건 이상 벌어지고 있다. 각종 문제로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군 기지 이전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지만, 정작 일본 정부는 대미 관계와 동아시아 안보를 이유로 미군 기지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어서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일본 내 지역 차별 역시 여전히 오키나와의 풀리지 않은 숙제다. 2016년에는 오키나와에서 시위활동을 벌인 시민에게 일본 경찰이 오키나와인을 비하하는 '토인(야만인)'이라는 발언을 저질러 큰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현재에도 일본 사회 곳곳에서 오키나와를 향한 지역 차별과 혐오의 표현들이 만연하고 있다.
'신하들이여, 슬퍼하지 말라. 생명이 있어야 모든 것이 의미가 있다'는 류큐의 마지막 국왕이던 쇼타이가 망국의 운명을 슬퍼하는 류큐인들을 위로하며 남긴 어록이다. 이는 오키나와의 기구한 역사를 함축한다. 한때 동아시아의 해상무역 강국이자 독립국이었던 오키나와는, 세계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수많은 시련을 겪으며 지금까지도 중국-일본-미국 등 어디에도 온전히 소속되지 못한 채 '영원한 이방인'으로 남아있다. 어쩌면 많은 부분에서 비슷한 역사적 아픔을 공유한 우리에게도 많은 동질감과 여운을 남기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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