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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이 그토록 듣고 싶던 말... 연쇄살인 판결이 준 위로

[리뷰] SBS <지옥에서 온 판사>

24.11.05 13:28최종업데이트24.11.05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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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지옥에서 온 판사> 스틸컷
SBS <지옥에서 온 판사> 스틸컷SBS

단테는 지옥을 발명했고, 우리는 착각했다. 지옥은 공간이 아니다. 상황이다.

그러니 세상에는 장대비 같은 지옥도 있는 법이다. 사람을 잃어야만 갈 수 있는 그곳은 용서의 이름으로 끝없이 '그만 슬퍼하라'고 말한다. <연옥> 속 단테처럼 아무리 기도해도 벗어날 수 없어서, 오죽하면 한 악마가 몸서리쳤다. 그것도 판사봉을 들고서.

SBS <지옥에서 온 판사>는 판사의 몸에 들어간 악마 '강빛나(박신혜)'가 지옥 같은 현실에서 죄인을 처단하며 진정한 판사로 거듭나는 드라마다. 지옥, 판사, 처단.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만 보아도 '사이다'스러운 문법이 예상되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하지만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종류는 아니었다. 이들의 '사이다'는 함께 용서하지 않는, 애도였다.

유가족이 용서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못 한다

 SBS <지옥에서 온 판사>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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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동안 <지옥에서 온 판사>는 여러 상황과 연출로 복수의 면면을 구현했다. 흔히 '복수'란 현실적인 해법으로 풀 수 없는 상황에 등장하는 단어다. 그래서 드라마는 교제 폭력, 아동학대, 노사 괴롭힘 등 현시점에서 가장 대두된 사회적 문제지만, 법적 제도의 부재로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사안들을 건드렸다. 이 지점에서 시청자는 탄식한다. 억울하고 답답하지만, 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이때 빛나가 등장한다.

빛나는 다른 의미로, 악마 같은 판사다. 현실 속 판사들이 온갖 이유로 감형과 무기징역 판결을 내리는 '악마'라면, 빛나는 악마 같은 술수로 가해자를 처단한다. 환각을 일으켜 가해자의 몸을 자르는 시늉을 하고, 피해자가 겪은 방식 그대로 가해자에게 되갚아주며 "피해자가 용서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죄"라고 답한다. 지나칠 만큼 잔혹한 방식으로 가해자에게 복수하지만, 사법제도보다 나은 판결에 시청자들은 "통쾌하다"고 평했다.

여기까지는 평범하고 흔한 '사이다' 드라마다. 그런데 복수극을 표방하던 <지옥에서 온 판사>는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힘을 풀었다. 12화~14화에선 빛나의 연인 '다온(김재영)'의 가족을 비롯해 13명을 살해한 연쇄 살인마 J를 심판하는 과정이 담겼다. 원한 서린 사이인 만큼 가장 자극적인 복수가 행해질 줄 알았지만, 드라마는 방향을 틀었다.

12화에서 다온은 형사로서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연쇄 살인마 J를 체포한다. 그러나 또 다른 피해자를 들먹이며 자신을 도발하는 살인마에 살인 충동을 느낀다. 두 손으로 소화기를 높이 들던 다온은 "경찰의 임무는 죄를 밝히는 것이지 주는 것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네가 경찰이라는 걸 잊지 말라"는 선배의 말을 떠올리고 이성을 되찾는다.

사적 복수가 아닌 공적 재판을 선택한 다온은 형사로서 직업적 소명을 다하며 동시에 유가족으로서 존엄을 지켰다. '용서하지 않되, 똑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는 마침내 연쇄 살인마 J를 재판장에 세웠다. 그는 "모르는 일이다", "그런 적 없다"며 범행을 부인했고, 일부 범행은 공소시효가 만료돼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이에 빛나는 "유가족들이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들은 사형 선고로 지난 세월을 보상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상처를 치유 받기를 원할 뿐이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건 피해자에 대한 애도와 위로다. 피해자와 피해 유가족이 용서하지 않는 죄는 법 또한 용서하지 않는다"라며 사형을 선고한다. 너무나 쉽게 용서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함께 용서하지 않겠다"는 빛나의 한마디는 유가족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우리의 방식을 되돌아보게 한다.

사회가 당신을 용서하지 않겠다

 SBS <지옥에서 온 판사> 스틸컷
SBS <지옥에서 온 판사> 스틸컷SBS

드라마 대사처럼 현실 속 유가족이 원하는 것은 보상과 복수가 아닌 치유와 위로다. 이를 행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가 함께 애도하고 질문해야 한다. 그들이 온전히 슬퍼할 수 있도록 사회는 "괜찮냐"는 말을 유가족과 스스로에게 해야 한다. 그러나 위기 상황에서 세상은 쉽게 유가족에게 "그만 슬퍼하라", "이제 용서하라"고 말한다.

<지옥에서 온 판사>는 그 현실을 지옥으로 보았던 걸까. 판사로서, 혹은 악마로서 빛나는 여러 가해자를 처단할 때마다 매번 "피해자에게 용서받았냐"고 묻는다. '용서받을 필요가 없다', '이미 신께 용서받았다' 등 돌아오는 대답은 천차만별로 무책임하지만, 궁극적으로 빛나가 따지는 건은 용서의 여부가 아니다. 사과의 유무다.

빛나는 마지막으로 연쇄살인마 J를 향해 "사과는 의무지만, 용서는 의무가 아니라는 걸 지옥 가서 확실하게 배우길 바란다"고 종지부를 찍는다.

용서를 미덕이라 배우고 자라지만, 세상에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누군가의 죽음이 그렇다. 이를 두고 '왜 용서하지 않느냐'고 다그치기 이전에 가해자가 올바르게 사과했는지, 사회는 유가족이 회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는지 따져야 하지 않을까.

아슬아슬하게 자극적인 '사이다'와 진정성 사이에서 핸들을 꺾던 <지옥에서 온 판사>가 막을 내렸다. 현실 죗값을 재판하기 위해 지옥에서 판사까지 초빙해야 한다니. 어쩌면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곳은 문지기가 없는, 회전문처럼 누구나 입성할 수 있는 지옥일 지도.
지옥에서온판사 THEJUDGEFROMHELL 박신혜 김재영 김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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