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물공부방 아이들만석동 43번지
문보미
어머니는 큰물공부방 활동과 만석동 철거투쟁 과정에서 만났던 인연들을 기억하신다. 비록 글자는 잘 몰라도 리더십도 있고 똑똑하셨다던, 가족과 이웃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이 있던 아주머니들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다 기억하지는 못해도 나에게 공장과 갯벌의 바다가 다정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종종 자랑처럼 말한다.
"어릴 때 우리 집에서 십 분만 걸어 나가면 바다였어."
"아, 좋았겠다."
그들이 떠올리는 것은 다른 풍경이리라는 것을 알지만, 나는 진심으로 말한다.
"응, 좋았어."
큰물공부방이 있던 만석동이 흐릿한 어린 기억 속 고향 같다면, 해님방이 있던 십정동은 돌아갈 집 같다. 가끔 꿈에서 철거되기 전의 그 동네를 걷는다. 어릴 때 내 눈에 비친 것처럼 비탈은 가파르고 골목은 길다. 좁은 골목에는 때묻은 스티로폼 박스 위 붉은 분꽃과 메꽃들이 올라서 있다. 삐걱대는 은빛 샷시문이 있는 해님방이 있고, 좀더 걸어가면 유리문이 달린 해님책방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선생님들이 웃으신다. 큰물공부방에서도 해님 공부방에서도 우리는 같은 노래를 불렀던 것 같다.
"함께 나누는 기쁨과 슬픔, 함께 느끼는 희망과 공포, 이제 우리는 비로소 알았네. 아주 작고 작은 곳."
밤에 자다가 슬픈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잠결에 어른들의 두리번거리는 말을 들었는데, 나보다 몇 살 많던 관순이 언니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취한 아버지에게 자주 맞아 어두운 낯빛이었지만 가끔 수줍게 웃곤 했던 언니였다.
우리 어머니는 가정폭력으로 쫓겨나 골목에서 울고 있던 젊은 아주머니를 집에 데려와 재우기도 하셨다. 폭력들이 더 낮은 곳으로 흐르던 달동네에서 그래도 아주머니들은 서로 먹을 것을 나눴고, 우리는 즐겁고 씩씩하게 놀았다. 해님방을 중심으로 한 동네 주민들의 힘으로 더 큰 폭력들을 막아내기도 했다.
반강제 복강경 수술과 관련된 싸움에서 이긴 적도 있다. 한 번은 해님방으로 동네 아주머니가 숨을 몰아쉬며 뛰어왔다. 마침 있던 어머니를 붙잡고 외쳤다고 한다.
"보미 엄마, 나 좀 숨겨줘요. 살려줘요."
그때는 '하나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가 여기저기 붙어있던 시기였다. 정부는 불임시술을 하는 병원에 지원금을 주었고, 병원들은 가난한 동네를 돌면서 '간단한 무료 수술'이라며 여성들을 꾀어 데려가 불임 시술을 시켰다. 사인을 한 뒤에는 '마음이 바뀌었다, 안 하겠다'고 해도 간호사들이 양 옆으로 팔을 잡고 봉고차에 태웠다고 한다. 그날도 간호사들을 피해 달아나던 아주머니가 해님방으로 온 것이었다. 정확한 정보도 충분한 상담도 진료도 없는 마구잡이 수술이라, 당연히 후유증도 컸다. 해님방에서 피해 여성들의 증언을 모아 제출한 건의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동네를 순회하는 가족계획 요원이나 병원 봉고차에 유입되어 수술을 받았습니다.
[...]정부의 시책을 믿었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밤낮없이 일해야 하는 형편인데, 당시 받은 수술로 인해 수술 전에는 겪지 않던 통증(극심한 생리통, 구토, 허리통증, 하반신 마비 등)으로 매일 일정한 기간 또는 수시로 몸져눕게 되고, 그 치료비 또한 적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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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님방을 중심으로 강력히 문제제기 한 결과, 피해 여성들은 복원 수술과 후유증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열 살이었던 나는 그 상황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그래도 무언가 바뀌어간다는 것 알 수 있었다. 늘상 아팠던 앞집 아주머니가 뭔가 눈을 빛내면서 열심히 이야기하는 것을 본 것도 같다.
만석동-십정동 생활은 '축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