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장면 갈무리
tvN 스토리
이어 중종 13년인 1518년에는 현량과(賢良科) 제도가 조광조의 제안으로 실시된다. 기존의 과거시험이 합격자의 인품까지 파악할 수 없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인재를 추천하고 왕의 심층면접으로 검증해 관리를 선발하자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막상 현량과로 합격한 인재들을 살펴보니, 대부분 조광조와 친분이 있거나 학연이 있는 자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조광조가 이들을 직접 선발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현량과 시행 이후로 조정에 조광조 일파가 대거 늘어나는 사태를 초래하며 중종의 경계심을 사게 됐다. 그리고 이는 조광조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자산이던 도덕성과 공정성에 큰 흠집을 남긴 실책이 됐다.
여기에 반년 뒤인 1519년 10월에는 조광조가 가짜 공신에 대한 '위훈 삭제'를 주장하며 제2의 소격서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중중반정으로 책봉된 공신의 숫자는 무려 117명이었는데 이 중에는 실제로 반정에는 기여한 것이 없는 공신의 친인척이거나 재물로 공신 명단을 구매한 가짜 공신도 있었다. 조광조는 가짜 공신들을 재조사해 부당하게 얻은 재산을 몰수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는 나름대로 근거와 명분이 있는 주장이었다.
문제는 조광조의 내로남불과 정치적 감각의 부재였다. 중중과 반대파들의 입장에서 보면 조광조 일파의 인사 철학이란, 자신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현량과로 등용된 인물은 '이상적인 인재'라면, 반정공신은 가짜이기에 '없애야 할 대상'으로 구분하는 이중잣대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반정으로 신하들에게 옹립된 중종에게 공신 책봉의 당위성을 부정하는 조광조의 태도는, 곧 '군주의 정통성'까지 위협하는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중종의 입장에서 조광조는 더 이상 믿을만한 신하가 아니라 왕권을 흔드는 위험인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조광조 일파는 소격서 사태와 마찬가지로 반대하는 중종을 집요하게 압박해 위훈 삭제를 이뤄낸다. 그야말로 마음만 먹으면 못 할 일이 없었던 조광조와 사림파의 세상이 된 것처럼 보였다.
조광조 일파의 숙청
하지만 실제로 이미 조광조의 몰락은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위훈삭제 이후 불과 4일 만에 기묘사화가 터지면서 조광조 일파가 한꺼번에 숙청을 당한 것이다.
조광조는 설마 중중이 자신을 직접 제거하려 했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는 감옥에서도 '선비가 태어나서 믿는 것은 임금의 마음뿐이다. 다른 뜻은 전혀없다'라며 중종에 대한 여전한 신뢰와 충성을 강조했다. 또한 조광조는 옥중서신을 보내어 중종에게 한 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읍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종은 조광조의 마지막 애원을 차갑게 외면했다. <중종실록>에는 당시 기록하던 사관도 중종의 냉혹한 태도에 큰 충격을 받은 듯 '조금도 가엽게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서 나온 것 같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1519년 12월, 조광조는 유배지에서 중종이 보낸 사약을 받고 38세의 나이로 결국 운명을 달리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조광조는 담담하게 사약을 받아들이며 '임금 사랑하기를 부모 사랑하듯, 나라 사랑하길 집 걱정하듯 했네'라는 시를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현대에 들어서 조광조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엇갈린다. 조광조를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쉬운 선택보다 의미 있는 선택을, 타협보다 원칙을 강조하던 정치가로서의 일관된 행보를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부정적인 평가에서는 성리학적 이념에만 집착한 이상주의와 단순과격한 흑백논리에 치우친 독선의 한계를 지적하며, 과연 그가 오래 살았더라도 진정한 조선의 개혁가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지는 회의적인 시선도 나온다. 조광조의 화려한 비상과 급격한 추락은, 결국 정치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균형을 찾는 과정이라는 교훈을 남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