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빙 <우씨왕후> 관련 이미지.
티빙
지도자가 엄연한 국제 정세를 무시하면 나라가 어떻게 될 수 있는지를 <우씨왕후>의 고발기가 1827년 전에 온몸으로 보여줬다. 이 드라마 제8회에서 묘사됐듯이 그는 고구려 왕족이면서도 외국과 손잡고 동족에 맞서 전쟁을 벌였다.
고발기가 자신을 배제하고 왕권을 차지한 형수 우씨와 동생 고연우에게 창칼을 겨눴다. 과연 이 행동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그의 군사행동은 당시의 시대 흐름에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고발기는 형인 고국천태왕(고국천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한 197년에 형수와 동생의 제휴 때문에 왕위계승에서 배제됐다. 1순위 계승권자였던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왕권을 차지한 동생 고연우와 '왕후 연임'에 성공한 형수 우씨를 상대로 군대를 일으켰다.
이 시점은 한나라(BC 202~AD 8)를 계승한 후한(25~220)이 쇠락의 길을 걷고 위·촉·오 삼국시대(220~280)가 등장하기 얼마 전이었다. 그래서 중국대륙에서 통합보다는 분열의 에너지가 훨씬 크게 작동할 때였다.
그런 경향은 만주(요동)에 대한 후한의 영향력 약화를 초래했다. <우씨왕후>에 거명되는 공손탁이 요동태수가 된 189년 이래로 후한 요동군은 사실상 독립국이 됐다. 후한과 고구려 사이의 요동이 이렇게 됐기 때문에 후한이 고구려를 압박하기도 힘들고, 요동군이 중앙정부의 지원하에 고구려를 압박하기도 힘든 형국이 조성됐다.
이 상황을 포함해 후한의 중앙집권력이 약해지는 서기 2세기는 중국을 압박하는 고구려에 유리한 시대였다. 184년에 고국천태왕이 요동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것도 이런 시대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후대의 광개토태왕(391~413)·장수태왕(413~491) 때만큼은 아니지만, 고발기 반란 이전의 만주는 한나라보다 고구려 쪽에 훨씬 더 기울어 있었다. 동쪽이 서쪽을 압박하는 기운이 왕성했던 결과다. 후한이 존재할 때 고구려를 이끈 태조대왕(재위 53~146)과 차대왕(146~165)의 시대에 대해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아래와 같이 기술한다. 인용문 속의 '조선'은 한민족 전체를 가리킨다.
"태조·차대 두 대왕 때는 고구려가 조선 전체를 통일하지는 못했어도, 고구려의 국력이 매우 강성했기 때문에 조선 안에서는 고구려에 필적할 세력이 없었다. 그래서 고구려가 한나라를 쳐서 요동을 점령하고 직예·산서 등지도 침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동쪽 고구려가 북중국을 깊숙이 공격할 정도였다. 이 정도로 서쪽 중국에 대한 동쪽의 압력이 커지던 시절에 고발기는 엉뚱한 짓을 저질렀다. 서쪽에 가담해 동쪽을 치는 대열에 가담한 것이다.
만주 땅을 중국에 갖다 바친 고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