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새벽 두시에 불을 붙여> 스틸컷
인디그라운드
02.
엄마가 도망간 상황에서 공짜로 기술을 가르쳐 준다는 이야기에 학원에 오게 된 선아(온정연 분)와 다니던 공장에서 잘렸는데 학교로 돌아갈 수 없어 오게 된 하진(김민지 분), 그리고 아빠가 보내서 왔다는 자신의 이야기까지. 영화는 화자인 서리가 기술학원으로 오게 된 원생들의 사연을 설명하면서 시작된다. 하지만 이들은 기술학원이라는 이름과 달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외부와의 연락도 차단된 채 자행되는 폭력 안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곳이 처음 생겼을 때는 나쁜 짓을 하면 끌려오는 곳이었다는 걸 알지만 그건 윗 세대의 이야기이지 자신들은 잘못으로 인해 잡혀온 게 아니라고 항변하는 이유다.
실제 모티브가 되는 '경기여자기술학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국가에 의해 적발된 매춘 여성들을 수감하던 장소로 활용되던 공간이, 후반부터는 학교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가출 및 비행을 일삼는 비행 청소년, 소년범, 고아 등을 수용하는 갱생기관으로 성격이 바뀌며 운영됐다고 알려져 있다.
이를 위해 학원이 자행했던 것은 앞서 언급했던 폭력과 감시를 기반으로 한 인권침해였으며, 강제적인 신앙 및 정신교육까지 실시했다고 한다. 이 작품을 통해 지금 바라보고 있는 장면은 분명 연기와 대본에 의해 짜인 하나의 플롯에 불과하지만 이와 유사한 모습이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영화는 때때로 현실의 가혹한 모습에 기대 자신의 내러티브를 완성해내기도 한다.
03.
"그러니까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에요. 다른 사람도 아닌 언니가, 하필 유림 언니가 그런 일을 벌인 건."
영화적 구조와 극의 극적인 전개를 위해 만들어진 인물은 서리가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는 유림이다. 그녀는 옥상의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사감이 내다 버린 편지들을 발견하고는 건물 전체를 불태우기 위한 계획을 세워가기 시작한다. 같은 방에서 먼저 커튼에 불을 지르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숙희 언니의 자리에 난 그을음조차 무서워하며 자리를 바꿔달라던 언니. 불을 너무 싫어하고 무서워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이 모든 사건을 계획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적극성이다.
사실 유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불우했던 기억과 아버지가 가족의 보금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만들어야만 했던 화염병에 대한 경험으로 자연스럽게 불에 대한 두려움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경험으로 인해 배운 또 다른 한 가지는 순종적이고 온건한 방법만으로는 자신이 지켜내고자 하는 것을 오롯이 지켜낼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스스로를 내던지는 선택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것. 이 영화에서 화재는, 불은 그런 의미다. 도박에 가까운 행동이기는 하지만, 이 기숙사 건물이 다 타 버리고 말 정도의 화재가 번지면 자신들도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는 작고 유일한 희망.
그래서 화자인 서리는 영화의 곳곳에서 '하필 유림 언니가 이런 일을 벌인 건 이상하다'고 되풀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