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벌거벗은 세계사> 방송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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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무솔리니의 선전과 선동 방식은 후대의 독재자들도 그대로 따라 하며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 대표적인 열혈 팬이 바로 히틀러였다. 그는 무솔리니를 '나치의 귀감'으로 치켜세웠고, 연설이나 제스츄어 등 무솔리의 사소한 행동까지도 그대로 모방했다. 실제로 무솔리니와 히틀러, 두 독재자는 미디어를 활용한 선동술, 쿠데타로 인한 권력장악, 폭력을 통한 독재체제 구축 등 대부분의 행보가 판박이처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정작 무솔리니는 히틀러를 내심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름대로 교사와 언론인을 지낸 무솔리니는 스스로를 지식인이라고 자부했기에, 고등학교도 중퇴한 히틀러를 은근히 무시했다.
하지만 히틀러의 독일이 유럽을 휩쓸며 세력이 점차 커지자, 무솔리니는 독일과의 군사적인 동맹이 자신의 권력 강화에 이득이 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1939년 5월 22일,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강철 조약'이라는 이름의 군사동맹을 체결한다. 그리고 조약 체결 4개월 후,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며 2차세계대전의 막이 오르게 된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특유와 기회주의적인 행보와 무능함으로 히틀러와의 신뢰에는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무솔리니는 독일-프랑스와의 전쟁 당시 처음에는 참전에 소극적이다가 독일의 승기가 굳어지자 뒤늦게 프랑스 영토를 점령하며 히틀러의 분노를 자아냈다.
또한 로마제국 부흥에 심취했던 무솔리니는, 유럽 강대국들이 전쟁의 참화에 휩쓸린 틈을 타 그리스와 아프리카의 이집트 등을 침공해 어부지리를 얻으려 했다. 정작 이탈리아군은 전쟁 준비가 돼 있지 않았고 군기도 엉망이었다. 심지어 무솔리니는 전쟁이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사막에 승전기념비 제작용 대리석을 수송할 것을 명령하는 기행을 벌이며 연합군의 비웃음을 샀다.
또한 1940년 10월 28일에는 굳이 '로마진군' 성공 기념일에 맞춰 그리스를 침공했다가, 예상과 달리 무려 6개월이나 고전하며 망신을 당하자 히틀러의 지원을 받고 나서야 겨우 그리스를 점령할 수 있었다.
무솔리니가 히틀러의 뒷목을 번번이 잡게 하는 일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이집트 전선에서는 독일군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결국 연합군에게 패전하고 만다. 무솔리니는 상황이 악화될 때마다 계속해서 히틀러에게 구원을 호소했고, 히틀러는 별 도움도 안 되면서 계속해서 전선만 늘려놓는 '금쪽이'가 된 무솔리니에게 크게 격분했다고 한다.
히틀러의 무시
히틀러는 이때부터 무솔리니를 무시하고 아랫사람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1941년 6월에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며 독소전쟁이 개막하자 강철조약에서의 협의도 무시하고 무솔리니에게는 알리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무솔리니는 이번에도 독일의 승리를 예상하고 소련에 20만의 대군을 자청해서 파병하여 승전국 지위에 숟가락을 얹으려는 오판을 벌였다. 정작 독일군은 이탈리아 병사들을 사실상 소모품에 불과한 방패막이 역할로만 활용했다. 결국 소득 없는 전쟁 장기화로 경제적-인적 손실만 커지면서 이탈리아 내부에서 무솔리니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날로 커져만 간다.
1942년 12월, 미국의 참전은 무솔리니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미국이 가세한 연합국은 추축국(독일, 이탈리아, 일본) 3국 중 '히틀러의 연약한 아랫배'로 불리던 최약체 이탈리아를 먼저 무너뜨리기로 한다.
연합국의 공격이 본격화되자 불리한 상황에 몰려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이탈리아군은 제대로 싸우지 않고 항복하기에 바빴다. 침공 한 달 만에 전세는 연합국에 기울어졌고, 1943년 7월 25일, 무솔리니는 총리직에서 전격 해임되고 직후 체포되어 구금당한다. 21년간의 철혈 독재가 막을 내리던 순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무솔리니를 끌어내린 것은, 바로 그동안 그에 빌붙어 오랫동안 부귀영화를 누리던 파시스트당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무솔리니에게 모든 전쟁 책임을 돌려서 연합국과 협상의 도구로 삼으려고 했다. 무솔리니를 추종하던 파시스트들과 검은 셔츠단도 침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마제국의 영광을 내세웠던 무솔리니는, 카이사르를 배신한 브루투스처럼, 자신이 키워주고 아낀 파시스트들에게 배신당한 셈이었다.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몰락 소식을 듣자 곧바로 어제까지의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를 공격해 북부 일대를 점령하고, 무솔리니를 구출해내는 데 성공한다. 무솔리니는 독일이 이탈리아 북부에 세운 파시스트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의 수령으로 임명돼 이제 완전히 히틀러의 부하로 전락했다.
전세는 이미 연합국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연합국의 공세가 거듭되면서 파시스트 공화국의 운명도 벼랑 끝으로 몰리자 무솔리니는 이번엔 애인과 함께 스위스로 도망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독재자에게 두 번의 기적은 없었다. 1944년 4월 27일, 국경 일대에서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비정규군 요원이던 파르티잔들에게 생포를 당한다. 이튿날 무솔리니는 분노한 파르티잔들에게 무참하게 총살을 당했고 시신은 밀라노로 옮겨진다. 한때는 황제를 꿈꾸던 독재자의 비참하고도 허무한 최후였다.
사후 무솔리니에게 원한을 가진 이탈리아 시민들은 그의 시신에 침과 욕실을 퍼붓고 두들겨 패거나 총을 쏘기도 했다. 무솔리니와 애인의 시신은 거꾸로 주유소에 매달렸고, 특히 무솔리니의 얼굴은 얼마나 심하게 훼손됐는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1945년 3월 30일에는 무솔리니와 '애증의 콤비'였던 히틀러 역시 전세가 기울이며 베를린의 한 지하 벙커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두 독재자의 최후와 함께 '인류 최악의 전쟁'이던 2차대전은 막을 내리게 된다.
'파시스트 독재정권의 역사는 거짓말 위에 세워졌다.' 역사학자 페데리코 펜첼스타인의 격언이다. 무솔리니의 인생은 한 지도자의 무책임한 독선과 몽상이 나라를 어떻게 파멸로 이끌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였다. 한편으로 그러한 독재자의 출현을 막지 못한 사회 역시 결국 큰 댓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은,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냉엄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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