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장면 갈무리
tvN 스토리
발기는 요동으로 달아나 후한에 항복했고 적국의 군대를 몰아 고구려를 침공해 왔다. 산상왕은 용장이던 동생 고계수를 보내어 이를 토벌하게 했다. 고발기의 군대는 크게 패배했고 고발기는 고계수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됐다. 고계수는 사사로운 원한으로 나라를 멸망시키려고 했던 형 고발기를 크게 꾸짖었다. 부끄러움과 후회를 견디지 못한 고발기는 달아나 스스로 목을 찔러 죽음을 맞이했다. 산상왕은 형 고발기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러줬다.
이로써 반대파를 제거한 산상왕은 형수였던 우씨를 다시 왕후로 맞아들인다고 선포했다. 정작 산상왕은 이미 결혼해 처자식도 있는 상태였다. <삼국사기>에는 "왕이 우씨로 인해 왕위를 얻었으므로 다시 장가들지 않고 우씨를 세워 왕후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대부터 마지막 왕조 국가였던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두 번에 걸쳐 왕후에 책봉된 것은 우씨가 유일무이하다.
이처럼 두 명의 왕을 번갈아 남편으로 두며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우씨의 유일한 아킬레스건은 후사를 낳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내의 힘을 빌려 집권한 산상왕은 우씨와 연나부 세력의 눈치를 보느라 후사가 없음에도 마음대로 후비를 들이지도 못했다. 귀족 연맹체 사회였던 고구려에서 왕권이 그만큼 취약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기 208년 11월, 산상왕은 우연히 주통촌이라는 마을에서 한 여인을 만난다. 신성한 제사에 사용할 돼지가 달아나자 여인은 몸을 사리지 않고 돼지의 앞으로 가로막았다고 한다. 이에 깊은 인상을 받은 산상왕은 우씨의 눈을 피해 몰래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여인의 이름은 의미심장하게도 후녀(后女, 왕후가 될 여인)였다고 한다. 산상왕은 5년 전 돼지꿈을 꿨던 것이 바로 후녀를 맞이들이기 위한 계시였다고 여기고, 그녀와 동침했다. 하지만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후비를 들이고 싶었으나 우씨의 눈치를 봐야 했던 산상왕이 적당한 명분을 만들기 위하여 꾸며낸 핑계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몇 달 뒤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분노한 우씨는 병사들을 보내 후녀를 죽이려고 했다. 당시 후녀는 이미 산상왕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도망가던 후녀는 막다른 곳에 몰리자 후녀는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왕의 명령이냐, 왕후의 명령이냐, 지금 내 배속에 아이가 있는데 실로 왕이 남겨준 몸이다. 내 몸은 죽일수 있겠으나 왕의 아이도 죽일수 있겠느냐"고 호통을 질렀다고 한다. 당황한 병사들은 후녀를 차마 해치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이를 알게 된 산상왕은 후녀를 데려와 후비로 삼았고, 우씨에게는 두 번 다시 후녀를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우씨로서도 더 이상 왕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209년 9월, 산상왕 재위 13년 만에 후녀가 마침내 아들을 낳으니 바로 고구려의 11대 국왕이 되는 동천왕이다.
우씨의 막강한 위세
후비가 아들을 낳았으나 우씨 왕후의 권력은 여전히 굳건했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우씨로 대표되는 연나부 세력과 산상왕 사이에서, 지위와 권력을 보장해 주는 댓가로 후비와 아들을 건드리지 않는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227년 5월 산상왕이 승하하고 동천왕이 그 뒤를 이었다. 왕태후가 된 우씨와 연나부는 동천왕 즉위 이후에도 막강한 위세를 뽐냈다. 기록에 따르면 우씨는 놀랍게도 왕이 타는 말의 갈기를 자르게 하거나, 시종을 시켜서 식사하는 왕의 옷에 국을 엎지르게 했다고 한다. 왕을 대놓고 무시하고 핍박할 정도로 우씨의 위세가 대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오랜 세월 천하를 호령하던 우씨도 막을 수 없었던 것은 세월이었다. 왕후로 47년, 왕태후로 7년, 반세기 넘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우씨도 노년에 접어들며 건강이 점점 악화됐다. 삶이 다했음을 직감한 우씨는 '산상왕의 능 옆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런데 형사취수혼을 한 아내는 본 남편(고국천왕)의 곁에 묻히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우씨가 정략혼을 했던 첫 번째 남편 고국천왕보다는, 자신의 의지로 혼인했던 산상왕을 더 진정한 남편으로 인정했던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234년 9월, 우씨가 사망하면서 그녀의 시신은 유언대로 산상왕의 곁에 묻히게 된다.
우씨가 세상을 떠난 후 오랜 시간이 흘러 후대의 평가는 어떠했을까. 유교적 가치관과 가부장제가 확립된 조선시대에 이르러 우씨는 '희대의 악녀'로 온갖 악평을 받게 된다.
<동사강목>에는 "한 몸으로 두 번이나 국모가 되었으니 완악하고 음탕하고 부끄러움이 없기가 고금천하에 이 한 사람뿐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선비들을 두고 "그 행위가 개돼지만도 못하다, 짐승 같은 행실 추악하다"고 앞다투어 비난을 퍼부었다.
심지어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조선의 21대 국왕 영조는 우씨의 이야기 거론되자 "이는 말할 수도 없고 읽을 수도 없는 일이다. 이렇게 음란하고 더러운 말을 입에 가까이해서는 안 되니 진강하지 말라"고 역정을 낼 만큼 혐오했다고 한다.
우씨는 여성으로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며 정해진 운명을 거부했고, 당대의 제도를 이용해 두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강단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왕위 계승을 조작해 신성한 왕권을 제멋대로 주무르고 전횡을 일삼은 악녀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유교적 가치관에서 남편과 가족에 대한 도덕도,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성도 모두 지키지 않았던 우씨가, 결국 금기를 어긴 사악한 여성이라는 오명으로만 오랫동안 남게 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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