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틸 이미지
㈜엣나인필름
'세상 종말 전쟁'의 불안에 저항하는 영화
감독의 일관성은 그가 쓴 책에서도 확인된다. 책 <봉인된 시간>은 그의 영화를 이해하는데 필독서로 자리매김했다. (현재는 개정판 <시간의 각인>으로 재출간) 글에서 느껴지는 순교자의 태도는 곧 감독의 영화를 이해하는 기본 입장으로 널리 수용되었다. 과거 사회주의권 영화로 분류되던 그의 작품들은 제작 시기에 맞춰 국내에 소개될 수 없었다. 그래서 국내 관객은 영화보다 책으로 먼저 타르코프스키를 접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전후 사정 탓에 그의 종교적 관점과 영화 예술에 대한 헌신적 태도는 거대한 '이콘'처럼 늘 영화에 후광처럼 따라붙기에 이른다.
그런 감독의 일관된 관점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이해하는데 필수요소라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종종 감독이 자신이 살던 시대에 대해 (정치적 발언을 일삼진 않았지만) 평범한 이들보다 얼마나 예민하고 치열하게 반응했는지 간과됐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희생>은 1986년에 세상에 공개됐지만, 공전의 성공을 기록한 국내 개봉은 거의 10년이 지난 1995년에야 이뤄졌다. 지각 개봉이 당시에 드문 일은 아니긴 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10년 시차가 '결정적 쐐기'로 작용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희생>은 물론 전작 <향수>에서도 엿보인 당시 세계에 대한 고민과 불안의 정서는 곧 걸작 그래픽노블(과 이에 기반한 영화 및 드라마)인 <왓치맨>이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초기 걸작 <초인지대>의 그것과 직결된다. 미국과 소련이 쟁여놓은 핵무기와 화약고 위에서 불장난하듯 툭하면 터지던 긴장 고조,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한 환경파괴와 기후위기 등 암울한 징후가 충만하던 시대의 정서다. 국내에 지각 개봉하기까지 시차 동안 그 긴장의 밀도가 휘발됐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특히 우발적 핵전쟁에 의한 세계 종말을 알리는 시계가 11시를 가리키던 시절의 절망이 타르코프스키의 후기작들에서 두드러진다.
시대정신을 투영한 절박한 공감 덕분에 <향수>에서 자기희생과 고행을 통해 세상을 구하려던 이들의 시도는 <희생>에서 한층 더 숭고해진다. 물론 '알렉산더'의 '희생'은 가족과 지인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그 자신도 이를 포기한 지 오래다. 타인들에겐 그저 광인의 발작에 불과할 테지만, 그는 기꺼이 희생을 감내하고 그가 누렸던 모든 것을 포기한다. 이런 주인공의 행보는 러시아 고전문학에서 종종 엿볼 수 있는 '행복한 바보'의 전형이다. 타인의 시각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적 확신과 충만에 만족하는 고결한 무지의 미학인 셈이다. 그런 감정의 고양을 보고 있자면 처음에 들던 당혹감이 점점 설명할 수 없는 감동으로 치닫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아무리 냉소적 태세를 취해도 버틸 수가 없다.
그런 만감의 교차가 영화의 막판, 타르코프스키의 전매특허인 '롱-테이크' 기법의 극한과 화학반응을 일으키듯 감정의 폭발로 기어코 이어진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방박사들의 경배'와 바흐의 마태수난곡 중 'Erbarme Dich'(불쌍히 여기소서)'는 그저 거들 뿐이다. 영화는 오락이자 산업이라는 세상의 당연한 법칙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마지막으로 토해낸 '희생' 앞에서 무의미해진다. 그렇게 주인공이 아들에게 들려주던 전승은 간절히 바라고 희생을 치른 덕분에 진실이 된다. 보고 있자면 그야말로 순교자의 영화, 예술로서의 영화다. 과거의 전설이 아니라 지금 우리들의 시대에 더 간절해질 진심의 영화를 극장에서 목격할 드문 기회가 다가온다.
<작품정보>
희생 The Sacrifice
1986 | 스웨덴, 프랑스, 영국 | 드라마
2024.08.21. (재)개봉 | 149분 | 15세 관람가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출연 에를란드 요셉손, 수잔 플리트우드, 알란 에드발 외
수입/배급 ㈜엣나인필름
1986 39회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예술공로상/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에큐메니컬상
2024 7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베를린 클래식 부문(4K 리마스터링 최초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