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일럿> 스틸
롯데엔터테인먼트
나이스한 '가부장', 한정우
한정우는 조건만 따지면 좋은 남자다. 파일럿이란 번듯한 직업에 벌이가 좋다. 주변 동료들과 서글서글하게 지내며 단란한 가정도 이뤘다. 유명 방송에 나와 "어머니께서 자식 때문에 희생했다"며 눈물 흘릴 줄 안다. 하지만 정우의 이면에는 일그러진 남성상이 있다.
그는 평소 돈 벌어 주면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한 태도로 집안일을 하지 않고 아내가 수술했다는 것조차 모른다. 어머니의 칠순 잔치도 아내가 대신 준비한다. 발레리노를 꿈꾸는 아들에게 파일럿의 꿈을 강요하며 비행기 장난감을 선물한다. 이혼하자는 아내에게 "혹시 남자 생겼냐"고 묻고, 섭섭함을 드러내는 가족에게 "나 같은 사람이 없다"며 큰소리치는 가부장의 정석이다.
어딘가 어긋난 정우의 친절함은 직장에서도 계속된다. 회식 자리에서 상사가 여성 승무원들에게 모욕적인 발언을 하자 분위기를 풀겠다며 그들을 '꽃다발' 같다고 칭하고, 술을 따라 달라고 한다. 의도와는 별개로 결과는 처참하다. 싸늘해진 식당, 수치심과 분노가 뒤덮인 직원들의 표정. 차가운 공기를 감지하지 못한 채 정우는 홀로 회식 자리를 누비며 사방팔방 장난을 건다.
누군가 이 광경을 녹음했다. 그리고 고발했다. 한순간에 정우는 직장에서 잘리고 만다. 한 치의 반성 없이 그는 억울해 한다. 곧바로 자신이 따랐던 '아는 형님'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일자리를 동냥한다. 이조차 통하지 않자 새로운 회사에 지원한다. 한 면접관이 여성 지원자를 향해 "여자는 결혼과 임신 때문에 고민스럽다"고 임신 계획을 캐묻는 순간에도 정우는 무관심하다.
그러나 '꽃다발' 사건으로 정우는 재취업에 실패한다. 우연히 만난 후배가 "그 회사 CEO 자리에 여자가 앉으니까, 여성을 더 많이 뽑는다"며 부당함을 토로하자 정우는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직접 '꽃다발' 같은 파일럿이 되기로. 정우는 여동생의 힘을 빌려 '정미'로 다시 태어난다.
정우의 차별은 노골적이지 않다. 하지만 위력적이다. 그는 아내에게 모든 집안일과 가정사를 전가하면서 자신을 '괜찮은 남편'이라 칭하고, 직장 내 성적 괴롭힘에 동조했으면서 자신이 '좋은 동료'였다고 믿는다. 또 공고한 남성 집단의 힘에 기대어 재기를 꿈꾸면서 여성 CEO가 여성 할당제에 관심을 갖는 건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영화는 정우의 모순적인 행동을 통해 한 인간이 지닌 입체적인 면과 그 안에 담긴 차별적인 지점을 포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