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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만남 반복하는 연인,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것

[20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26] 영화 <겹겹이 여름>

24.07.25 10:44최종업데이트24.07.25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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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겹겹이 여름> 스틸컷
영화 <겹겹이 여름> 스틸컷인디그라운드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어떤 인연은 한 번의 선언으로 관계의 종말을 맞이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인연은 끝내 되살아나기도 한다. 종언(終言)이 세상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노력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이별을 막지 못한 모든 연인의 마지막에 분투와도 같은 절실함이 놓여 있지 않을 리 없어서다. 보통의 종말은 전부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함께 지나온 시간을 지우고, 공유해 왔던 기억을 잘게 부스러뜨리고, 선명했던 존재의 흔적마저 모두 삼켜 여기로부터 떨어뜨려 놓는다. 자신이 딛고 있는 선형의 세상에서는 다시 닿을 수 없는 아주 먼 곳으로.

끝내 소멸하지 않는 인연에게도 더 나은 종류의 노력 같은 건 없다. 관계의 끝자리에서 내려다보이는 조각난 마음은 누구에게나 날카롭고 공허하다. 서로에게 상처가 없는, 어느 쪽도 서로의 등허리를 아쉬워하지 않는 이별이라고 해도 그렇다. 헤어짐을 경험하는 모두는 결코 돌려주지 못할 마음 하나를 안고 혼자가 된다. 자신의 것이지만 오롯이 자신의 것은 아닌 이 마음을, 어떤 이들은 메말라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깨끗이 잊지 못하거나 질척이는 모양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보통의 종말이 아닌 것, 그들에게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 <겹겹이 여름> 속 두 인물 연(이노아 분)과 강(김우겸 분)은 몇 번의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관계가 항상 연속되는 것은 아니다. 길게는 몇 년의 시간을 둔 채로 서로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가게 되기도 하지만, 두 사람은 어느 여름의 계절마다 서로를 알아본다. 끝내 떨어지지 않던 스물셋의 여름과 재회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어질 수 없던 스물여덟의 여름, 그리고 지나온 시간의 상흔 속에서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던 서른셋의 마지막 여름까지. 영화는 겹겹이 쌓인 계절의 단층을 푸르른 여름의 이미지로 치환해 내고자 한다.

02.
"나 사실 너 보고 싶었어. 진짜로."

연과 강이 스물여덟이던 해의 여름은 영화가 선택하는 첫 번째 계절이 된다. 4년 만의 재회가 이루어졌던 여름이다. 이 시점의 두 사람은 오래전 이별을 한 상태다. 헤어져 있던 사이 남자는 편집자가 되었고, 여자는 이사를 했다. 강은 준비하고 있던 시인 등단의 꿈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많은 것이 변했다. 두 사람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과거 놀이터였던 공간은 이제 작은 공터가 되었다. 오래된 고궁의 담벼락을 보존하기 위한 시의 정책으로 인해서다. 4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무더운 여름날의 풍경과 소소한 장면 속에서 웃는 두 사람이다. 여전히 아이처럼 유치하게 구는 강의 모습도 그대로이고, 그런 모습에 화가 난 연을 다시 웃게 만드는 남자의 미소도 변함없이 똑같다. 영화가 직접 알려주는 것은 아니지만, 강이 건넨 아이스크림도 분명 기억 속 연이 좋아했던 종류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런 그를 다시 보고 싶었다는 여자의 마음이 같은 모양으로 남았다. 하지만 역시 4년이라는 시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이때의 강에게는 만나는 사람이 있고 두 사람은 엇갈린다.
 
 영화 <겹겹이 여름> 스틸컷
영화 <겹겹이 여름> 스틸컷인디그라운드

03.
영화가 선택한 첫 계절의 엇갈림은 이 영화에서 주춧돌과도 같다. 이 신(Scene)으로 인해 이 작품은 두 사람의 재회만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되풀이되는 구조가 나쁜 것은 아니다. 이미 다른 작품에서도 여러 번 등장 한 바 있다. 다만 이 경우에 영화 전체는 반복의 대상이 되는 장면을 향해 점층적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별의 반복이 결국 관계의 끝으로 매듭지어지는 식이다. 이 작품에 놓이는 세 번의 현재에도 유사성은 있다. 현재의 장면 속에 놓인 연과 강의 모습이 온전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서로에게 충실한 때의 연인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 모습을 모두 다른 그림으로 그려내는 일은 그래서 더 중요하다.

우리의 삶은 누군가 바라보는 자리에서만 이어지지 않는다. 영화 속의 인물들 역시 그렇다. 관객이 바라보는 시간, 연출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장면 이외의 시간에서도 모두의 시간은 흐른다. 서브텍스트다. 이 작품은 그 어떤 이야기보다 인물들의 드러나지 않는 시간에 충실하다. 관객이 바라볼 수 없는 시간 위에서도 연과 강의 사랑이 지속하도록 만든다. 헤어지고 또 만나도록 만든다. 서른셋의 여름 첫 장면에서 두 사람은 다시 이별한 상태로 등장하지만, 대화를 통해 1년 전의 시점에서 연인이었던 사실을 유추할 수 있게 되는 것 역시 그래서다. 여름이라는 계절이 두 사람이 함께한 10년의 시간 속에서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세 번의 장면만은 분명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연과 강의 시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렇게 차곡히 쌓인다.

세 번의 현재 시점 사이마다 두 사람이 함께했던 시간의 몽타주가 배치되는 것 또한 이 영화가 연과 강의 시간을 그리고자 하는 방향과 맞닿아있다. 짧은 영상 속에는 대개 두 사람이 어떤 모양으로 함께인 시간을 보내왔는지, 또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의 장면들이 포함된다. 이는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시간에 대한 증명이자 인장과도 같다.

04.
"내가 미안해. 자꾸 도망쳐서."

시간의 선형적 순서에 따른 두 사람의 첫 번째와 마지막 이별은 (아마도) 스물셋의 여름 첫 장면과 서른셋의 여름 중반에 놓인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 이별을 먼저 통보하는 쪽이 연이라는 점이다. 스물여덟의 여름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이는 남자의 거절이나 통보가 아닌 상황에 의한 것이다. 연이 손을 내치면 강은 언제나 그 뒤를 쫓았다. 명목은 그녀가 놓고 간 물건을 되돌려주기 위함이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인연의 고리를 놓지 않기 위한 행동이다. 이 글의 처음에서 이야기했던 표현을 다시 빌려오자면, 자신에게 있는 연의 마음을 돌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별과 재회의 사이에는 많은 변화들이 놓인다. 두 사람의 어떤 재회는 그래서 완성되지 못하기도 했다. 이제 변해버린 것들 앞에서 자신들의 변하지 않은 모습을 지켜내지 못한 것이다. 스물셋의 첫 이별과 서른셋의 마지막 이별은 그 이유마저 다르다. 연이 처음에 서로를 사랑했던 모습이 이제는 싫어져 버렸고 사람은 잘 변하지 않기에 다시 같은 이유로 헤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로 또 한 번 손을 뿌리칠 때 강이 항변하는 이유다. 헤어질 때 이유가 있는 것처럼 다시 만나는 데도 이유가 있다고. 남자는 이번에도 여자의 뒤를 쫓는다. 지금까지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것. 이번 계절의 재회를 이루어지게 만든 하나다.
 
 영화 <겹겹이 여름> 스틸컷
영화 <겹겹이 여름> 스틸컷인디그라운드

05.
작품의 말미에는 안미옥 시인의 '아주 오랫동안'이라는 시 일부가 놓인다. 완전히 닿을 수 없는 타인에 대한 불가능성과 그런데도 자신이 믿어온 것에 대한 담담한 태도가 극 중 두 인물의 관계를 포개어 감싼다. 이는 영화가 기대고 있는 계절의 속성과도 정확히 마주한다. 어쩌면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 관계의 싹을 틔우고 시들어가는 과정은 사계(四季)의 흐름과 동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계절이 단 한 사람과의 관계 위에 놓인 시간 속에서 겹겹이 쌓여가는 일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할 것인가.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계절은 앞으로도 계속 시간의 더께를 쌓아갈 것이다. 연과 강의 시간도 그러하기를 바란다. 여러 겹의 얼굴이 겹쳐 흐를 때 비로소 아침이 시작된다.
덧붙이는 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하고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운영 중인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는 2024년 2월 15일(목)부터 총 18개의 큐레이션을 통해 ‘20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선정작 92편(장편 22편, 단편 70편)을 소개/상영할 예정입니다. 열한 번째 큐레이션인 '직진은 재미없으니까'은 7월 16일부터 7월 30일까지 보름간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회원 가입 후 무료로 시청 가능합니다.
영화 인디그라운드 겹겹이여름 이노아 김우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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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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