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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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서기 나선 싱가포르
리콴유의 기대와 달리, 말레이 연방은 이후 싱가포르와의 공동시장 조약을 지키지 않았다. 말레이 연방은 본토 위주의 개발과 말레이인 우대 정책을 밀어붙였고, 이는 다인종 국가인 싱가포르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차별 정책이었다.
싱가포르 내에서는 서로를 적대시하던 말레이인과 중국계 화교 간의 인종갈등이 점차 악화됐다. 급기야 1964년 7월에는 말레이계 무슬림들이 예언자 무함마드 탄신일을 기념하는 행진을 하던 도중 중국계와 충돌해 대규모 사상자가 속출하는 폭력 사태로 번졌다. 이 시점에서 이미 말레이시아 연방과 싱가포르는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상태였다.
툰구 압둘라만 말레이시아 연방 총리는 1965년 8월 헌법 개정을 통해 골칫거리가 된 싱가포르를 2년 만에 연방에서 전격 축출하기로 결의한다. 이는 싱가포르와는 합의가 없었던 일방적인 결정이었다. 당시 방송에 출연한 리콴유는 연방 축출 통보의 충격으로 인하여 인터뷰 도중 눈물을 흘리며 기자회견이 잠시 중단되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로써 싱가포르는 독립 국가로서 온전한 홀로서기에 나서야 했다. 리콴유가 먼저 주목했던 것은 다인종 국가였던 '싱가포르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작업이었다.
리콴유는 먼저 대통령으로 말레이인이던 유솝 빈 이스학을 임명하면서 인종 간의 화합 메시지를 강조했다. 또한 화교와 말레이인, 인도인이 다수를 차지하던 싱가포르에서 과감하게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했고, 중국과 말레이의 국기 디자인을 결합한 싱가포르만의 국기를 제작했다.
이어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생존을 위한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다. 리콴유는 철저한 '무관용 원칙'을 표방하며 철저한 규칙과 질서에 따라 운영되는 법치국가를 추구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1952년 총리 직속의 부패행위조사국(CPIB)을 설립하며 강력한 수사권을 부여했고, 1960년에는 부패방지법을 도입하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부패행위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선언했다. 리콴유는 1959년 한 연설에 각료들과 함께 모두 하얀 옷을 입고 등장하며 청렴결백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리콴유는 관료들이 부정부패의 유혹에 노출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공무원의 임금을 대폭 인상했다. 싱가포르에서 총리를 비롯한 관료들의 연봉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꼽힌다. 싱가포르는 지난 2023년 발표된 '세계 국가 청렴도' 순위에서는 무려 83점으로 아시아 1위, 세계 5위(1위는 덴마크)를 차지했다.
특히 지금까지도 엄격한 규칙과 질서를 강조하는 특유의 '엄벌주의' 문화 때문에 싱가포르는 외국인들에게는 '벌금의 왕국'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 손 운전, 타인의 와이파이 사용, 길거리나 껌을 뱉거나 쓰레기를 투척하는 등 사소한 부주의에도 싱가포르에서는 막대한 벌금을 물거나 봉사활동을 해야 하며, 이는 외국인에게도 예외가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21세기에 현대 국가에서는 거의 사라진 태형(회초리로 엉덩이를 때리는 형벌)이나 사형까지도 집행되는 나라가 싱가포르다. 1993년 미국인 소년 마이클 페이가 싱가포르에서 차량 50대를 연이어 파손하는 비행을 저지르다가 체포된 후, 강대국인 미국 정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끝내 태형을 집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2002년에는 베트남계 호주인 투옹 반이 싱가포르 공항에서 마약을 반입하다가 적발되어 호주 정부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형이 집행되기도 했다.
엄벌주의 바라보는 시각차
이러한 싱가포르의 엄벌주의 정책에 대해 일각에서는 인권을 소홀히 여긴다고 비판한다. 동시에 법과 원칙에 예외가 없다는 일관된 이미지와 안전한 치안에 대한 신뢰를 주는 요소로도 인정받고 있다.
또한 싱가포르는 교육에 있어서는 효율과 경쟁을 중시하는 철저한 '엘리트 위주의 차등 교육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교육 기관들은 초-중-고상위 단계로 갈수록 진학의 기회가 줄어들고 경쟁에서 이겨만 상급 학교로 진학할 수 있는 피라미드 시스템이다. 학업성적에서 떨어지는 학생들은 직업훈련원으로 가서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싱가포르에서는 대학 입학이 곧 엘리트를 증명하는 수단이 되고, 장학생으로 국가적인 지원을 받는다. 싱가포르는 다양한 국제학교를 설립하여 글로벌 인재 양성에 주력하고 있었으며, 세계대학순위 상위 20위에 싱가포르 대학이 두 곳이나 이름을 올릴 만큼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다.
한편 리콴유는 1961년부터 국가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국가 주도 하의 공업 중심 개발 정책, 해외 자본 유치, 파격적인 세금 감면 정책을 추진하며 싱가포르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이어 리콴유는 지리적으로 좁은 도시국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규모 간척사업을 추진했다. 1965년만 해도 서울보다 작았던 싱가포르의 국토는 지속적인 간척사업으로 영토를 22%나 확장하며 현재 서울의 약 1.2배까지 넓어지게 됐다.
1960년대 높은 실업률을 개선하기 위하여 싱가포르 정부는 노동력 중심의 단순 제조업 의존도에서 벗어나, 70년대 후반부터는 석유화학, 컴퓨터 제조업 등 기술집약적 산업에 집중투자를 하면서 크게 발전하게 된다. 이때부터 해외 유명 브랜드의 제조공장들도 싱가포르에 대거 진출한다.
무역업과 금융업. 관광업 등도 싱가포르에서 번성했다. 1960년대 7억 달러에 불과했던 싱가포르의 무역 GDP는 이미 1980년대 초반에 이르면 66억 달러로 20년 만에 급격히 성장한다. 싱가포르의 관광수익은 2022년 기준 한화로 약 14조 8000억에 이른다.
또 싱가포르는 70년대부터 외환 자유화를 도입하고 전 세계은행의 지점들을 유치했다. 1984년에는 아시아 최초의 금융선물거래소까지 설립했다. 이로 인해 싱가포르의 금융업계는 각종 수수료와 환전 수익만으로도 막대한 차익을 확보하고 있다. 세금 우대정책으로 인하여 전 세계의 부자들이 세금을 피하여 싱가포르로 귀화하는 일도 빈번하다. 2023년 현재 싱가포르는 미국 뉴욕, 영국 런던, 홍콩과 더불어 세계 4대 금융도시에 선정되며 국제 금융거래의 요충지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싱가포르의 이러한 화려한 성장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존재한다. 법치주의를 내세운 엄격하고 권위적인 사회 통제로 싱가포르는 2023년 언론자유지수에서 '나쁨' 수준인 126위, 민주주의 지수는 69위로 '결함있는 민주주의'라는 평가를 받는 등 부정적인 면모도 동시에 안고 있다. 리콴유의 장기 집권에서 비롯된 특정 가문의 권 력독점과, 사회적 다양성-포용성의 부족이라는 싱가포르의 약점은, 시대가 변화하면서 끊임없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지도자는 비전을 가져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는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의 통치 철학을 드러내는 어록이다. 싱가포르가 철저한 국가 주도 정책으로 기반을 마련하고 각종 산업을 개발하며 아시아 최부국까지 기적 같은 경제발전을 이뤄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업적이다. 하지만 번영과 발전이라는 목표를 달성해낸 지금, 이제는 그 성공을 지켜내고 이어나갈 수 있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찾아내는 것은, 앞으로의 싱가포르에게 남겨진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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