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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유착'이 낳은 괴물 집단, 국가까지 삼키다

[리뷰] tvN <벌거벗은 세계사>

24.07.17 17:35최종업데이트24.07.17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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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가르히(Oligarch, 러시아어 Олигархи)'는 구 소비에트 연방(소련)이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러시아의 신흥 재벌집단을 의미한다. 이들은 소련의 붕괴를 틈타 온갖 불법과 악행까지 저지르며 막대한 부와 권력을 장악했고 러시아의 기득권 세력으로 올라선 '경제 마피아'로도 불린다.
 
러시아를 장악했던 올리가르히는 시대의 흐름 속에 누군가는 몰락했고 또 누군가는 모습을 바꿔 끈질기게 살아 남았다. 이들은 어떻게 러시아의 정치와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을까. 7월 16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60회에서는 붕괴된 소련을 삼킨 거대 재벌 올리가르히'편을 통하여 러시아의 신흥 기득권 집단으로 자리매김한 올리가르히를 조명했다. 류한수 상명대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빈곤과 굶주림에 허덕이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 관련 이미지.

tvN <벌거벗은 세계사> 관련 이미지. ⓒ tvN

 
소련은 2차대전 이후 공산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최강대국으로 올라서며, 자유진영을 대표하는 미국과 냉전체제를 구축하여 치열한 패권경쟁을 펼쳤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국가와 공산당이 모든 경제활동을 통제하는 '행정명령 경제체제'의 한계가 서서히 드러나며 소련에는 기나긴 경제 침체기가 찾아온다. 많은 소련 사람들은 빈곤과 굶주림에 허덕여야 했다.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최고권력자인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다. 그는 소련의 낡은 체제와 시스템을 바꾸기 위하여 '개혁과 개방'을 강조하며 '페레스트로이카( Перестройка, 재건) 정책을 추진한다. 그 핵심은 중앙정부가 모든 경제를 통제하던 시스템을 벗어나 기업 창업과 자율성을 허가하는 것으로 당시로서는 사회주의를 벗어나는 파격적인 정책이었다.

자본주의를 일부 도입한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소련 사회의 분위기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변화의 시류에 일찍 편승한 소련 사람들은 자신이 노력한 만큼 돈을 벌수 있는 자본주의 경제의 매력을 발빠르게 터득했다. 또한 고르바초프는 냉전을 종식하고 미국과의 화해 무드를 추진하면서 소련에도 맥도날드, 펩시 등 미국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매장과 상품들이 대거 진출하게 된다.
 
이러한 개방의 과도기를 거치면서 서방 물품들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자 소련 내에서는 '밀수품과 암시장'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리며 부유한 자산가로 성장한 세력들이 바로 훗날 러시아 국가와 경제를 장악하게 되는 올리가르히의 원조들이다.
 
그런데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생각지 못한 나비효과를 불러왔다. 오랫동안 공산당에 의하여 결정되던 사안들이 갑자기 자율에 맡겨지면서 적응하지 못한 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여기에 개혁과 개방정책를 계기로 그동안 소련이 힘으로 억눌러 왔던 다양한 정치적 요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중앙 정부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치달았다. 여기에 국영기업들의 부정부패, 자본주의 도입 후 오히려 늘어난 서민층의 빈곤과 빈부격차 등으로 개혁은 방향을 잃고 혼란에 빠졌고 중앙권력은 급격하게 약화된다.
 
또한 혼란한 틈을 타 신흥재벌이 된 올리가르히들은 소련 내 물품을 비싼 값에 외국에 판매하면서 수익을 챙기면서 경제 악화에 관여했다. 연이은 사회적 혼란속에 소련은 국가 재정까지 바닥나는 초유의 위기를 맞이한다. 급기야 분노한 소련 사람들은 개혁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소련을 계승한 오늘날의 러시아인들은 당시를 암울했던 '회색의 시대'라고 회상한다.
 
1991년 8월 19일, 소련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꾼 '8월 쿠데타'가 발발한다. 겐나디 야나에프 부통령을 비롯한 공산당 보수파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고르바초프를 구금하고 기존의 소련 체제로 회귀하려는 반동 노선을 추진한다.
 
급진개혁파이자 러시아 연방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던 보리스 옐친은 보수파를 강하게 비판하며 시민들의 열렬한 호응을 등에 업고 쿠데타를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옐친은 '러시아 민주주의를 수호한 영웅'으로 부상했고, 쿠데타로 사이좋게 몰락한 온건 개혁파와 반동 보수파를 대신하여 권력의 중심으로 올라서게 된다.
 
옐친은 비록 쿠데타에 맞서기는 했지만 고르바초프와도 정치적 노선이 달랐다. 고르바초프가 소련 체제 내에서의 개혁을 원했다면, 엘친은 아예 소련을 해체하고 독립된 러시아를 중심으로 본인이 군림하겠다는 정치적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

쿠데타 진압 이틀 후, 공식석상에 복귀하여 연설중이던 고르바초프에게 옐친이 다가가 중간에 연설을 끊고 삿대질까지 하면서 자신이 준비한 연설문을 읽어달라고 강요하면서 모욕을 주던 모습은, 당시 권력의 중심이 옐친에게 완전히 넘어갔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회자된다.
 
1991년 12월 21일, 소련이 끝내 붕괴되고 고르바초프가 사임하면서 옐친은 본인이 수장으로 있는 러시아 공화국을 중심으로 재편성한 러시아 연방의 대통령에 취임한다. 옐친은 미국의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를 경제고문으로 선임하고 급진적인 자본주의화를 통한 충격요법을 단행했다. 온건한 개혁으로 완급조절을 했던 고르바초프의 소련 시절과 달리, 옐친의 러시아는 사회주의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시장경제를 100% 받아들이는 정책을 추진한 것.
 
하지만 옐친의 급진적인 개혁 정책 속에는 혼란과 부작용을 대비한 사회 안전망이 전무했다. 루블화의 가치가 폭락하며 물가는 580배 가까이 폭등했고 러시아는 가난의 늪에 빠지게 된다. 급진 개혁의 피해는 고스란히 사회적 약자들에게 집중됐다. 어린 아이들이 돈을 벌기 위하여 길거리에 나와 구걸을 하거나 매춘업을 하는 참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삭스는 경제 고문에서 해임되었다. 러시아인들 사이에서는 미국이 러시아 경제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개입했고 삭스를 스파이로 보냈다는 음모론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오히려 수혜를 누린 세력들도 있었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돈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라는 본질을 꿰뚫고 있었던 올리가르히들이었다. 이들은 자본주의 본격적인 도입 이후 시장의 혼란과 루블화 가치 폭락의 빈틈을 노려 저렴한 가격으로 은행 산업에 뛰어들었고 허위와 과장광고로 고객들을 끌어모았다.
 
특히 이들이 노린 것은 '국가 자금'이었다. 훗날 러시아의 미디어 재벌로 성장하는 대표적인 올리가르히의 한 명인 블라디미르 구신스키는, 정부 고위관료에게 뇌물을 주고 해당 부처의 정부예산을 자신이 소유한 은행에 예치하는 식으로 자금을 끌어모았다. 구신스키는 루슈코츠 모스크바 시장과의 인맥을 활용하여 시의 자금을 유치하여 해외국채에 투자하거나 건설회사를 설립하여 대형 공사를 수주하는 식으로 막대한 수익을 거둬들였다.
 
또한 올리가르히들은 옐친정권의 공기업 민영화 정책을 틈타 러시아의 주요 국영기업들을 대거 독식하게 된다. 옐친은 국민들의 민영화 정책 참여를 독려하기 위하여 현금화가 가능한 바우처(주식매입증서)를 대거 배포했다. 올리가르히는 경찰과 폭력배를 동원하여 협박, 납치, 사기,살해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바우처들을 끌어모았고 이를 통하여 여러 국영 기업들을 매입하는데 성공한다.
 
점차 스케일이 커진 올리가르히들은 1995년에는 '주식담보 대출 경매'를 통하여 국고 부족에 허덕이던 옐친 정권에게 대출을 조건으로 거대 국영기업들을 담보로 해줄 것을 요구한다. 심지어 올리가르히들은 기업 경매 당일날에 경쟁자의 등장을 막기 위하여 공항과 도로를 점거하는 등 온갖 방해공작까지 서슴지 않았다.
 
한국으로 비유하면 공항공사나 전력공사같은 공기업을 개인이 헐값으로 넘겨받는 셈이었다. 그리고 당시 부패하고 무능했던 옐친 정권은 이러한 올리가르히들의 폭주를 전혀 제어하지 못하고 그저 방관했다.
 
러시아 최대 니켈 회사였던 노르니켈은 순이익만 12억 달러(3조 4천억)에 이르는 거대 기업었으나, 올리가르히 블라디미르 포타닌에게 매각되었을 당시의 가격은 고작 1억7천만달러(4800억)에 불과했다. 포타닌은 관료 출신으로 은행을 설립하고 노르니켈을 인수하여 신흥재벌의 반열에 올랐으며, 주식담보대출 방식을 처음으로 고안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다른 올리가르히인 미하일 호도르콥스키는 러시아의 국영석유회사 유코스의 지분 79%를 3억 900만달러(약 8700억)에 매입했는데 2년 만에 시장가치가 매입액의 30배로 폭등하기도 했다. 이처럼 옐친 시대에 급성장한 핵심 '올리가르히 7인방'의 재산만 모아도 러시아 자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 관련 이미지.

tvN <벌거벗은 세계사> 관련 이미지. ⓒ tvN

 
어느새 세력이 강대해진 올리가르히들은 서서히 정치 권력에도 개입하기 시작했다. 노쇠하고 무능한 옐친의 지지율이 폭락하고, 민영화와 자본주의에 비판적인 공산당의 인기가 상승하자, 위협을 느낀 옐친파 올리가르히 7인방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러시아 대선을 앞두고 옐친의 편에 섰다.
 
이들은 자신이 소유한 미디어 기업들을 활용하여 철저히 옐친에게 유리한 선전과 선동을 일삼았다. 또한 서방의 선거 전문가들을 대거 영입하여 '술주정꾼'으로 악명높던 옐친의 이미지 개선을 위한 마케팅 전략을 수립했다.

로스토프 대선 유세 당시 옐친이 직접 선보인 '막춤 댄스 퍼포먼스'역시 고리타분한 이미지를 벗고 친서민적인 캐릭터를 부각시키기 위한 선거 전문가들의 작품이었다. 옐친의 댄스타임 장면은 그해 '퓰리처상'까지 수상할만큼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올리가르히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옐친은 1996년 대선을 앞두고 지지율 1위로 올라선다. 하지만 2차선거를 불과 일주일 앞두고 심근경색으로 쓰러지는 돌발상황이 발생한다. 위기감을 느낀 올리가르히들은 옐친이 기자와 인터뷰를 한 것처럼 조작 기사까지 제작하며 옐친의 건강문제를 철저히 은폐했다.
 
그해 7월 3일 열린 2차선거에서 옐친은 결국 과반득표를 차지하며 재선에 성공했다. 올리가르히 7인방이 당시 러시아 대선에서 투자한 금액은 최소 1억달러(2700억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물론 옐친의 재집권 이후 정권에 기여한 올리가르히들은 국영기업 소유와 면세 등 각종 혜택으로 투자한 돈 이상의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또한 옐친의 최측근 올리가르히였던 베레좁스키는 국가안보회의 부의장, 포타닌은 경제부총리에 선임되는 등 재벌을 넘어 공직의 감투까지 차지하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1997년 '포브스'지가 발표한 세계 부자순위 상위권에서는 러시아 출신 올리가르히만 무려 4명이나 포함될 정도였다.
 
하지만 1999년 아시아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러시아까지 번지고 경제정책 실패와 건강문제가 겹치면서 올리가르히의 든든한 배경이던 옐친이 여론을 이기지 못하고 전격 사임을 발표한다. 궁지에 몰린 올리가르히들이 옐친을 대체할 새로운 간판으로 찾아낸 인물은 바로 블라디미르 푸틴 현 러시아 대통령이었다.
 
푸틴의 등장, 올리가르히 척결 추진

이전까지 무명에 가까웠던 푸틴은 실세였던 베레좁스키의 후원을 등에 업고 총리직에 올랐고 옐친의 권력이 쇠퇴한 틈을 이어받아 후계자로까지 낙점된다. 올리가르히들은 당초 푸틴을 옐친의 뒤를 이어 자신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해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푸틴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정작 집권 후에 대대적인 올리가르히 척결을 추진하며 뒤통수를 친다. 푸틴은 집권 후 첫 국정연설부터 "국가권위가 저하되어 효율적인 국정운영이 어려운 것은, 국정 상황을 이용하여 이익을보려는 세력 때문"이라며 올리가르히를 겨냥한듯한 발언을 내놓았다.
 
푸틴은 올리가르히 7인방중 가장 먼저 자신을 만들어준 '킹메이커'이자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베레좁스키를 탈세 혐의로 구속하고 그가 소유했던 기업들을 다시 국영으로 전환시켰다. 베레좁스키는 이후 영국으로 망명하며 푸틴의 축출을 주장하며 비난에 앞장섰으나 2013년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밖에 구신스키와 호도로콥스키 등도 푸틴의 숙청을 피하지 못하고 재산을 모두 빼앗긴 후 망명하거나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러시아 국민들도 신흥재벌의 부정부패를 척결한다는 푸틴의 명분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다만 푸틴은 자신의 정치권력에 위협이 될만한 올리가르히들만 잔혹하게 척결했을뿐, 본인에게 순종하거나 경제적 활동에만 집중하는 올리가르히들까지는 건드리지 않았다. 7인방중 포타닌은 사후 자신의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서약을 하며 살아남았고, 아벤과 프리드만은 푸틴의 최측근으로 거듭나며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여했다는 의혹으로 서방의 제재대상에 포함되기도 했다.

푸틴의 등장으로 1세대 올리가르히의 전성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올리가르히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푸틴의 동향친구이자 부총리까지 지낸 이고르 세친, 죽마고우 아르카디 로텐베르크 등은 푸틴 시대를 대표하는 이른바 '2세대 올리가르히'들로 꼽히며 현 러시아의 실세로 등극한다. 푸틴의 장기독재체제가 견고해지면서, 푸틴과 올리가르히들도 옐친 시절과 마찬가지로 서로를 이용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긴밀한 공생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결국 권력자만 바뀌었을뿐, 러시아 정치와 경제는 여전히 올리가르히의 수중에서 장악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돈을 신으로 모시면 돈은 악마처럼 그대를 괴롭힐 것이다.'

헨리 필팅의 격언이다. 올리가르히의 역사는, 국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부패한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이 결탁했을 때, 그 사회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하여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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