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초 앞, 1초 뒤>의 한 장면.
블루라벨픽쳐스
하지메는 빠르다. 늘 남들보다 한 발 앞선다. 좋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뭐 하나 잘되는 게 없다. 남들과 속도를 맞추지 못하니 말이다. 우체국 배달원을 하다가 속도위반으로 사무직을 하게 된 하지메는 우연히 뮤지션 사쿠라코를 만나 연애를 시작한다. 어느 날 드디어 잡은 정식 데이트 기회, 하지만 눈을 떠 보니 다음 날 아침 집이 아닌가? 지난 시간의 기억은 새카맣게 사라졌다.
레이카는 느리다. 어릴 때 큰 사고를 당해 부모님을 여의고 그녀도 크게 다쳤다. 늘 남들보다 한 발 늦다. 당연히 좋을 게 없다. 뭐 하나 잘되는 게 없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순간을 잡아 보려 사진을 시작했다. 잘 찍을 리가 만무하다. 어느 날 우연히 하지메를 본다. 하지메는 어렸을 적 병원에서 레이카에게 매일같이 말을 걸며 그녀에게 삶의 이유를 부여해 준 장본인이었다. 레이카에게 의미 있는 존재.
하지만 하지메는 레이카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에게 그녀는 그저 우체국에 가끔씩 찾아오는, 그러나 눈에 잘 띄지 않는 소녀일 뿐이다. 그런데 하지메는 사쿠라코를 만나러 가는 길에 일어난 일련의 일을 되짚어가는 과정에서 레이카의 존재를 기억해 낸다. 그리고 어렸을 적 둘이서 한 약속도 기억해 낸다.
그렇게 하지메는 레이카가 우체국에 방문하길 기다리는데 레이카는 오지 않는다. 하지메와 레이카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들은 서로를 온전히 기억하는 상태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의 시선과 그녀의 시선
<1초 앞, 1초 뒤>는 2020년 현지 개봉한 대만 영화 <마이 미씽 발렌타인>을 리메이크한 일본 영화다. 원작은 중화권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금마장 영화제 제57회에 5관왕(장편영화상,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시각효과상)을 차지하며 큰 화제를 뿌린 바 있다. 영화가 줄 수 있는 가장 극점의 것들을 선사한 것이리라.
그런데 영화는 중반까지 딱히 별다를 게 없다. 남들보다 조금 빠르게 사는 하지메, 일본어로 시작 또는 처음을 뜻하며 표기도 '일(一)' 자로 하는 하지메의 일상을 보여줄 뿐이다. '빠름, 빠름'을 외치는 세상이라지만 그가 사는 곳은 '1000년의 수도' 교토이니 만큼 그리 메리트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영화는 오히려 남들보다 조금 느리게 사는 레이카가 스토리의 메인 시선으로 등장하며 급변하기 시작한다. 그의 시선에선 의미 없던 것들이 그녀의 시선에선 의미가 있었다. 그 자체로 빠른 것보다 느린 것이 세상을 더 잘 보고 나아가 더 잘 살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은유라고 하겠다. '한 걸음 더 천천히 간다 해도 그리 늦은 것은 아냐'라는 노랫말도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