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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천하'의 실제 주인공, 조선 사회 발칵 뒤집은 여성

[리뷰] tvN <벌거벗은 한국사>

24.07.04 16:45최종업데이트24.07.04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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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난정(鄭蘭貞 1506-1565)은 조선 중기의 인물로, 당대의 권신이었던 윤원형의 첩실이자, 실세인 문정왕후와는 올케-시누이 관계였다. 그녀는 비천한 출신에도 불구하고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권력을 등에 업고 정실부인 독살-사리사욕에 의한 부정부패-정치개입을 통한 국정농단 등 각종 악행에 앞장섰다.
 
정난정은 조선 시대 여성으로는 드물게 실록에까지 그 이름을 남겼으며, 현대에도 고 강수연을 주연으로 했던 사극 <여인천하>를 비롯해 <조선왕조 오백년-풍란>,<옥중화> 등 여러 유명 드라마에서 비중있게 다뤄지며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난정은 어떻게 자신의 신분을 뛰어넘는 과분한 권세를 누릴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녀의 이름은 '국정농단'의 대명사가 돼 역사에까지 반면교사로 두고두고 기록을 남기게 됐을까.
 
 tvN <벌거벗은 한국사> 화면 갈무리

tvN <벌거벗은 한국사> 화면 갈무리 ⓒ tvN

 
조선 정치 '흑막'으로 부상한 정난정
 

지난 3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115회에서는 '윤원형의 첩 정난정은 어떻게 국정을 농단했나' 편을 통해 정난정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정난정은 1506년(연산군 12년) 무관 출신의 양반인 정윤겸의 딸로 태어났다. 정윤겸은 중종반정에 참여했던 공신이자 종2품 절도사까지 역임한 고위 무관이었으나, 어머니는 군영 노비 출신의 첩실이었다. 본래 조선시대의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에 따르면, 정난정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천인이 돼야 했지만, 정윤겸이 아내를 양인(良人)으로 속량시켜준 덕분에 정난정의 신분도 자연히 양인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훗날 정난정이 윤원형의 첩실이 된 이후에도 양첩(良妾, 양반가 출신)이 아니라 천첩(賤妾,천인 출신의 첩)으로 기록된 것을 보면, 신분질서가 확고했던 조선시대의 특성상 천인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기는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학계에서는 이러한 '신분에 따른 차별과 멸시'가 훗날 정난정의 성격 형성과 악행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편 윤원형은 문정왕후 윤씨의 막내동생이자 조선 13대 국왕이 되는 명종의 외삼촌이다. 정난정이 어떻게 윤원형을 만나 첩실로 들어가게 됐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명종대에 어숙권이라는 인물이 집필한 야사 <패관잡기>에 따르면, 정난정은 기생이었고, 윤원형은 기방에서 정난정을 처음 만나 첩으로 삼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서녀지만 저명한 무신 집안의 딸이었던 정난정이 기생 출신이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보고 있다.

오히려 윤원형이 정윤겸 가문의 위세를 이용하고자 정난정을 첩으로 들여 연결고리로 삼으려했다는 가설이 더 유력하다. 그리고 정난정 역시 왕실의 외척인 윤원형을 통해 신분상승의 욕망을 품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난정은 첩실로 들어간 직후, 후손이 없었던 정실부인 김씨를 제치고 윤원형의 아들을 낳았다. 이어 궁궐까지 드나들면서 올케인 문정왕후의 총애까지 얻게 돼 그 위세가 날로 높아졌다.

당시 조선시대는 내외법(內外法)으로 인해 남녀간의 접촉이 엄격하게 금지돼 있었다. 여성인 정난정은 일개 첩실이었지만 남편과 올케의 위세를 등에 업고 자유롭게 궁궐 출입이 가능했다. 권력욕이 강했던 문정왕후로서도 궁궐 밖 정보책이자 전달책으로서 정난정을 적극 이용하려고 했던 측면이 있다.
 
자연히 정난정은 올케와 시누이의 관계를 뛰어넘어 문정왕후의 정치적인 최측근이 된다. 학계에서는 정난정이 윤원형과 문정왕후로부터 연이어 전폭적인 신임을 얻은 사실을 두고, 뛰어난 언변과 재주로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매력이 탁월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545년(명종 즉위 원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벌어지면서 정난정은 일약 조선 정치의 흑막으로 부상하게 된다. 당시 조선 조정은 대윤(윤임)과 소윤(윤원형)의 두 파벌로 나뉘어 있었고, 공교롭게도 대윤의 구심점인 윤임과 문정왕후-윤원형은 같은 파평 윤씨 가문으로 먼 친척지간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정적이었다.
 
윤임과 대윤파는 1544년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자 잠시 정국의 주도권을 잡는 듯 했다. 하지만 문정왕후의 견제와 핍박을 받던 인종은 불과 재위 8개월 만에 요절했고, 어린 명종이 즉위하면서 대비가 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맡게 돼 전세는 완전히 역전된다. 이에 윤원형이 주도한 소윤이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정치공작을 통해 대윤 일파를 모조리 숙청시킨 사건이 바로 을사사화다.
 
정난정은 을사사화 당시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오가며 연락책을 맡았고, 문정왕후에게 정적인 대윤 일파를 탄핵할 것을 적극 제안하기도 했다. 문정왕후는 정난정을 통해 윤원형에게 밀지를 내렸다. 문정왕후의 의중을 확인한 윤원형은 곧바로 대윤파에게 역모죄를 뒤집어씌워 탄핵에 나섰다. 이에 윤임은 유배지에서 끝내 사사됐고, 나머지 핵심 인물들도 줄줄이 유배되면서 대윤은 몰락하게 된다.

이어 1547년에는 을사사화의 후속편인 정미사화(丁未士禍)가 터진다. 경기 양재역 일대에 문정왕후의 전횡을 비방하는 벽서가 게재된 것. 하지만 이 사건도 윤원형과 소윤 측이 벌어진 정치적 자작극이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실제로 정미사화를 통해 벽서에 연루됐다는 의혹을 받는 대윤 잔존파들이 모조리 숙청됐다. 옥사로 처형되거나 유배된 이들만 100여 명을 넘길 만큼 그 규모는 오히려 본편이라고 할 수 있는 을사사화보다도 더 컸다.
 
 tvN <벌거벗은 한국사> 화면 갈무리

tvN <벌거벗은 한국사> 화면 갈무리 ⓒ tvN

 
조선 최고 권세가의 정실부인으로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잔혹함은 친족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문정왕후의 남동생이자 윤원형의 형이 되는 윤원로는 대윤파와 대립하다가 정치적 공격을 받아 유배를 당했다. 윤원로는 을사사화 이후 소윤이 집권하면서 조정으로 복귀했지만, 정작 집권과정에서는 공헌한 일이 없어서 한직으로 밀려나게 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문정왕후와 소윤을 저주하는 뒷담화를 내뱉다가 발각돼 분노를 사게 된다.
 
그런데 윤원로를 고발한 것은 놀랍게도 바로 동생 윤원형이었다. 사실 윤원형은 형이 돌아오면 자신을 대신해 다시 권세를 빼앗길까 경계했고, 다른 신하들에게 사주해 윤원로를 고발하게 했던 것. 심지어 윤원형은 문정왕후에게 윤원로를 제거할 것을 요청했고, 문정왕후는 이를 수락하면서 결국 윤원로는 유배지에서 사사된다. 권력 앞에서는 혈육도 형제남매도 없다는 비정함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윤원형이 권력의 실세로 떠오르게 되면서 정난정의 기세 역시 등등해졌다. 윤원형의 집앞에에서는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뇌물로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뇌물을 정난정이 받으면 윤원형이 보답으로 관직을 내주는 방식으로 매관매직이 성행했다.

또한 정난정은 하늘높이 치솟은 화려한 저택을 10여 채나 지었고, 이미 재물이 밖에까지 넘치는데도 끊임없이 집을 지어 토목공사가 한창이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오죽하면 <명종실록>에는 '뇌물이 국고보다 많았다.'고 할만큼 당시 윤원형-정난정 부부의 탐욕이 극심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밖에도 정난정은 명나라로 사행길을 떠나는 역관에게 적은 돈만 주고 비싸고 귀한 물건들을 가져올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국가 소유의 산을 무단으로 차지하고 살던 백성들을 내쫓는가 하면, 생계를 위해 백성들의 나눠가지던 볏짚까지 빼앗아 팔아치우며 이윤을 챙겼다. 정난정 부부의 잇단 전횡으로 민심이 극도로 악화되자 보다못한 한 신하는 "욕심많은 오랑캐 신하라도 이렇게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개탄했다고 한다.
 
또한 정난정 부부는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금은으로 꾸민 그릇을 사용했으며 방안에는 초호화 가구를 두고 왕실보다 더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렸다. 심지어 윤원형은 왕실 소유의 말에 정난정을 태우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부부가 사실상 왕실의 권위를 참칭하면서도 정작 왕실의 눈치는 전혀 보지 않았다. 심지어 정난정은 백성들이 착취로 굶주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물고기에게 시주를 한다는 이유로 귀한 쌀밥을 강물에 공양하며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한편으로 이러한 정난정 부부의 선을 넘어 막나가는 행동은 그만큼 조정을 문정왕후와 친윤원형 세력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에, 눈치를 봐야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정난정 부부의 특혜는 자식들에게도 이어졌다. 정난정의 자식들은 첩실인 어머니의 신분상 본래 서자로 취급되고 과거시험에도 응시할수 없었다. 하지만 국왕 명종은 공신인 윤원형의 공로를 감안하면 그 자식들의 신분을 특별히 적자로 인정하고 문과 시험까지 응시할수 있게 하는 혜택을 제공했다.
 
또한 명종은 윤원형의 요청에 따라 서얼방금법(庶孽防禁法)를 개정해 양인의 서자까지 문과에 응시가능하도록 아예 법까지 개정한다. 이것이 정말로 명종의 의지였는지는 의문이지만, 결과적으로 국왕이 국가가 확립한 신분질서를 깼다는 점에서 당대에서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는 동시에 서자인 자식들도 공식적으로 윤원형의 뒤를 이을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배후에는 당연히 자식에게 신분의 멍에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을 어머니 정난정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정난정은 자식 문제만이 아니라 본인을 위해 조선의 신분제도를 또 한 번 뒤흔들었다. 당시 조선은 3대 국왕 태종 13년에 도입된 '일부일처법'에 따라 처첩을 엄격히 구분했다. 첩은 결코 처가 될 수 없으며 이혼도 허용하지 않도록 법으로 정해놓았다. 하지만 정난정 부부는 명종과 문정왕후에게 요청해 조강지처 김씨와 이혼을 허락받고 내쫓았으며 그 혼수마저 모두 약탈했다. 정난정은 이로서 첩실에서 일약 조선 최고 권세가의 정실부인까지 등극하게 된다.
 
윤원형이 이후 정1품 부원군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서 정난정은 자연히 정경부인(貞敬夫人, 조선 시대 정일품 종친의 부인에게 주던 내명부 관등 작위)의 반열에까지 오르게 된다. 오직 자신과 가족들의 탐욕만을 위해 국정을 농단하고 법과 원칙까지 무너뜨린 대가로 얻은 권력이 그 정점에 도달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정난정의 탐욕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명종이 후계자를 두지 못하자, 정난정은 자신의 딸을 중종의 서자인 덕흥군의 아들과 혼인시켜 명종의 양아들로 삼는 방식으로 왕위계승까지 개입하려는 야욕을 보인다. 그러나 이는 명종의 강력한 거부로 무산된다. 훗날 명종의 사후, 결국 왕위는 조선 최초의 방계 출신 임금이 되는 선조가 계승하게 된다.
 
 tvN <벌거벗은 한국사> 화면 갈무리

tvN <벌거벗은 한국사> 화면 갈무리 ⓒ tvN

 
욕심이 부른 파멸

한편으로 정난정의 이러한 무리수는 당시 노쇠해 건강이 악화되고 있던 문정왕후가 사망할 경우, 자신과 가족들의 운명도 바람 앞의 등불이 될 것을 이미 예측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 정도로 당시 정난정 부부는 이미 조정과 민심을 가리지 않고 공공의 적이 된 지 오래였다.
 
1565년 문정왕후가 끝내 사망하면서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정난정 부부의 권세에도 종말의 순간이 다가왔다. 오랫동안 벼르고 있던 대간들은, 일제히 윤원형과 정난정을 탄핵하기 시작했고 공식적으로 거론된 죄목만 무려 26가지에 이르렀다.
 
명종은 당시 어머니 문정왕후의 상중임을 고려해 외삼촌인 윤원형을 일단 겉으로 비호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하지만 대간들의 상소가 거듭되자 명종도 결국 윤원형의 관직과 품계를 모두 삭탈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조치를 취했다. 또한 정난정도 정실과 정경부인으로서의 직위를 박탈하고 다시 첩으로 강등시켰다.
 
정난정의 수난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동안 윤원형-정난정이 저질렀던 전횡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번엔 정난정이 과거 윤원형의 정실부인었던 김씨를 독살했다는 혐의가 다시 제기됐다. 고발자는 바로 김씨의 어머니로, 윤원형과 정난정이 몰락하자 비로소 딸의 죽음에 대한 억울함을 뒤늦게 호소한 것이다. 이에 조정에는 정난정을 불러들여 추국하라는 상소가 빗발치기 시작했지만, 명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565년 11월, 황해도 강음으로 내려가 남편과 숨어 지내던 정난정은, 어느날 도성에서 자신을 잡으려고 금부도사가 내려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명종실록>에 따르면 불안에 떨던 정난정은 "남에게 제재를 받느니 스스로 죽음만 못하다"는 말을 남긴 뒤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고 한다.
 
하지만 허망하게도 이는 노비의 착각으로 인한 오보로 드러났다. 운명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지, 천벌이라고 해야 할지, 그래도 한때는 한 나라를 좌지우지하던 인물의 허무한 최후였다.

그리고 정난정의 죽음에 상심한 윤원형도 시름시름 앓다가 불과 5일 만에 세상을 떠난다. 윤원형 역시 언제 조정에서 자신을 사사하러올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몸과 마음이 이미 피폐해진 상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의 역사학계에서는 정난정은 그저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비위를 맞추는 하수인에 불과했고, 권력암투에 깊이 개입했다고 보는 것은 과장된 평가라는 분석도 나온다. 다만 그녀가 남편과 올케의 권세를 등에 업고 자신의 신분과 도리를 넘어선 전횡을 일삼았으며, 백성들을 착취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정난정은 비천한 신분과 여인의 한계를 딛고 한때는 권세의 중심에 올라서는 행운을 누렸지만, 정작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을 올바르게 활용할 생각은 하지 못했고 오히려 지나친 욕심으로 스스로의 파멸을 초래했다. 만일 그녀가 자신과 같이 차별 받는 처지에 있는 비주류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선한 영향력을 전하려 노력했더라면, 훗날의 평가는 바뀌지 않았을까.
벌거벗은한국사 정난정 문정왕후 윤원형 여인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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