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20Kg 인생> 스틸컷
인디그라운드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너무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막상 눈 앞의 현실이 되고 나면 상상 이상의 무게가 이 일에 놓여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내어주어야 하는 것은 기본. 돌봄이 시작되고 나면 어느 하루의 공백도 허용되지 않는다. 함께하는 시간의 주체가 자신이고, 돌봄의 대상을 계획대로 잘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도 때때로 무너진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들이 불쑥 찾아온다. 생각처럼 되지 않는 날이면 처음의 마음도 모래알처럼 흩어져버린다.
그런 날들만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돌봄의 일이라는 것이 고통과 인내의 반복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누구도 그 자리로 선뜻 나아가고자 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는 생각보다 어려웠던 현실의 민낯만큼이나 훨씬 더 다양하고 두터운 감정들이 몸을 숨기고 있다. 이제 막 발을 들여놓은 이들에게는 쉽게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돌본다고 생각했던 일이 함께 걸어가는 시간으로 변모하고, 일방적인 관계라 여겨지던 날들이 서로 주고받는 관계로 성장하는 동안에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그렇게 스스로도 돌봄의 대상이 된다. 사실 우리 모두는 돌봄이 필요한 존재다.
02.
"동물도 사람 보고 자리 뻗어요."
다큐멘터리 < 20kg 인생 >에는 강릉으로 향한 가연씨의 이야기가 있다. 서울의 가장 분주한 강남에서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며 온라인 심리 상담만 기다리던 직장인. 그렇게 힘들게 회사를 다니면서도 남는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스타트업까지 세운 그녀에게는 그 모든 시간을 뒤로 한 결정이었다. 가연씨의 말을 빌리자면, 강릉은 누군가를 특별히 사랑하거나 미워하지 않아도 되는 도시다. 자신의 삶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건들여지지 않는 일상이 바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로렌과 로지, 두 어린 강아지의 임시보호를 결정하게 된 것도 이곳이었다. 언젠가 다른 가정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확정된 미래가 있었기에 끝까지 책임질 필요가 없는 안전한 관계라고 여겨졌다. 처음의 생각으로는 그랬다. 적당한 사랑을 주고 적절한 때가 되면 내어준 곁을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있는 대상. 어쩌면 이 선택에는 그녀가 서울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아직 채 벗어나지 못한 마음 속 한 구석에 엉킨 과거의 시간이 영향을 줬을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에는 두 이야기가 있다. 감독이자 화자인 가연씨가 두 강아지의 임시보호를 맡게 되면서 깨달아가는 돌봄과 관계에 대한 마음과 지나온 가족 관계 속에서 겪어야 했던 내면의 아픔에 대한 감정이다. 교차하는 화면 사이로 제시 되는 두 이야기는 언뜻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가끔은 흐름에서 벗어난 채로 던져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 정도다.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이야기 하나와 현재의 시점에서 시작된 또 다른 이야기 하나는 생각하지 못한 순간에 상응하며 하나의 장면으로 치환된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 장면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의 기록이다.
03.
돌보는 일에 대한 가연씨의 생각은 임시보호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로렌은 교정 방법을 찾지 못해 훈련소에 잠시 보내야 했을 정도로 호기심이 왕성했고, 로지는 몸이 약했다. 초창기 예정되어 있던 해외 입양이 무산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세상에 대한 두려움도 많았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의 연속. 생각과 다른 두 존재의 어려움과 이어지는 날들은 스스로에 대한 자책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두 강아지의 고향은 남양주시의 어느 개농장이다. 개농장에서 태어나 오물 덩어리를 먹고 자란 강아지들은 여러 가지 트라우마 때문에 문제 행동이 나타난다고 한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산책을 나가고, 해외 입양의 경우를 위해 영어로 가르치기도 하고. 그녀의 노력은 짧게 편집되어 하나의 몽타주가 된 영상 속에서도 또렷하다. 적어도 자신으로 인해 이 아이들의 내일이 일그러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듯한 마음이 스크린 너머로도 전해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