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BC 시대극 < 수사반장 1958 > 스틸 이미지.
MBC
< 수사반장 1958 >의 시대적 배경인 1958년에도 그랬다. 그해 1월 15일 서울 창덕궁 주변에서는 깡패가 아무 이유도 없이 경찰을 폭행하는 일이 있었다. 그날 발행된 <조선일보> 기사 '날뛰는 깡패, 순경도 구타'는 이영수라는 20세 된 깡패에 관해 이렇게 보도했다.
"이(李)는 아직 체포되지 않은 2명과 함께 13일 하오 6시 30분경 종로구 원남동 로타리에서 창덕궁지서 근무 이춘경(35) 순경을 무조건 구타하여 2주일간의 치료를 요하는 상처를 입힌 자라 한다."
깡패들의 등쌀에 경찰은 물론이고 헌병들도 몸조심을 해야 했다. 1959년에는 서울 동대문시장연합회에 소속된 정치깡패 이천일이 헌병을 위협한 일이 언론에 보도됐다. 그해 3월 22일자 <조선일보> '헌병 때린 깡패'는 이천일에 관해 이렇게 전했다.
"21일 서울 동대문경찰서에서는 동대문시장상인연합회 사원 이천일(29)을 재물손괴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하였는데, 이(李)는 동대문 일대의 어깨로서 21일 밤 11시경 서울시 종로구 봉익동 모 술집에서 싸움을 말리는 헌병에게 폭행을 가하고 술집 기물을 부순 것이라 한다."
그 시절에는 국회의원을 위협하는 깡패도 있었다. 1957년 12월 24일자 <동아일보> 3면 좌단에 따르면, 이 해에는 39세의 국회의원인 김두한이 대낮에 서울 명동 거리에서 "명동의 왕자인 R의 부하"인 "B"로부터 폭언과 모욕을 받고 폭행을 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
김두한을 '전설의 깡패'로만 여겼다면 B가 그런 행동을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승만의 미움을 사는 조봉암의 진보당에도 가세한 적이 있는 야권 의원이기에 함부로 대할 수 있었으리라 볼 수 있다. 김두한이 이승만의 자유당 편이었다면 그런 일을 벌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승만 정권과 깡패들의 밀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1957년 5월 25일의 장충단 민주당 시국강연회 방해 사건이다. 20여 만의 청중이 장충단공원에서 열리는 독재정권 규탄 집회에 모인 이날, 깡패 50여 명이 각목을 들고 단상으로 돌진해 연설회를 망친 이 사건은 경찰의 묵인 없이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이날 현장에는 1천여 명의 경찰관이 배치돼 있었다. 자신들보다 훨씬 적은 수의 깡패들이 행사장을 난장판으로 만드는데도 경찰들은 제지를 가하지 않았다. 27일자 <동아일보> 1면 중간에 실린 국민주권옹호투쟁위원회의 26일자 성명문에 "이날 천여 명이나 되는 경찰관들은 무엇 때문에 동원되었던가?"라고 묻는 대목이 있다.
경찰 1천여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정치깡패 50여 명이 야당 연설회장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장면은 깡패들의 꼭대기에 누가 있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저 독재의 모습을 시민 여러분은 똑똑히 목격하였읍니다"라고 위 성명문은 말한다.
이승만은 깡패들까지 앞세워 국민과 야당을 억압했다. 1948년 5월 31일의 기도를 무색케 하는 일이 그 자신에 의해 저질러졌다. 그런 이승만을 위해 기념관을 세우고 동상을 세우려는 시도가 진행되는 현실은 역사가 거꾸로 가고 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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