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그린나래미디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독립된 1편의 장편 극영화인 동시에 동일한 영상 이미지를 공유하되 상이한 방식으로 소개되는 또 다른 장편영화와 대칭을 이룬다. 이는 본 작품의 출발점과 제작과정을 통해 확인된다.
감독의 전작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너무나 인상적인 음악 활용을 선보였던 음악감독 이시바시 에이코가 일종의 뮤직비디오로 활용될 영상 제작을 의뢰했고, 그의 고향인 나가노현 후지미마치 정에서 촬영을 진행하던 중, 프로젝트가 확장되면서 2편의 거울 쌍이 탄생한 셈이다. 상당 부분 영상 소스를 공유하지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개발에 맞선 주민과 자연의 대립 구도라는 서사를 강조하는 극영화로서, 또 다른 작업인 < Gift >는 73분 분량의 무성영화 형태로 완성되었다. 이 버전은 기본적으로 이시바시 에이코 음악감독에 의해 실제 라이브 연주로 사운드를 대신하는 방식으로 공개되는 중이다. 전통적 방식의 극영화 작업과는 차별화된 실험적 문법의 결실인 셈이다.
일본 내에서도 산과 계곡이 울창하게 자연을 보전한 지역인 나가노 현 스와호 주변의 풍광은 영화의 주제의식 중 뼈대라 할 자연의 힘과 조화를 이상적으로 구현한다. 오래 손발을 맞춘 제작진은 다양한 시청각적 실험을 병행한바, 전통적인 대사와 인물 구도의 장면 일부(주민간담회가 대표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서사 대신에 이미지 자체가 상징화되는 추상적인 전개를 취한다. 의도적으로 과잉된 '트래킹 숏'은 카메라가 마치 인물이 이동하듯 움직이며 동일한 화면에 색다른 의미를 덧붙인다. 반면에 고정된 채 화면을 빤히 응시하는 극도의 '픽스 숏'이 등장할 때는 저 시선의 끝이 어디로 향하는지 혹시 화면 밖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지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사운드는 극도로 구분되는 활용법을 구사한다. 최소한의 서사 전개를 위해 인물과 대사 위주의 부분을 최소화한 자리에는 대사 대신에 확장된 뮤직비디오 마냥 이시바시 에이코의 창의적 실험과 도전의 결과물일 현대적인 불협화음과 긴장을 고조시키는 ost가 자유자재로 음성언어를 대체한다. 유려한 촬영을 통해 상징화된 대자연과 그 속에 개미처럼 붙어 있는 인간들의 이미지가 사운드트랙이 어떻게 기능하는가에 따라 천양지차의 기운으로 순식간에 바뀐다. 그저 형식 실험이라면 과잉이라 푸념해볼 만도 한데, 하나하나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광의의 주제와 연동된다. 이 정도면 논문용 작업에 가깝다.
여러 인터뷰에서 소개된 바대로 '타쿠미' 역의 오미카 히토시는 전문배우가 아니라 제작진 스태프의 일원으로 장소 헌팅 과정에서 그의 선 굵고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포착한 감독에 의해 선택된 존재다. 감독의 영화에서 드물게 등장한 청소년 배역인 '하나' 역 니시카와 료는 아역이라는 상투적 표현 대신 신비감과 함께 당당한 주역으로 제 자리를 확고히 한다. 또한 기업 '플레이모드'에서 난제를 떠맡은 두 관계자 역할의 배우들은 이미 감독의 전작 <해피 아워> 등에서 얼굴을 드러낸 바 있어 호흡이 척척 맞아떨어지며 기능적 캐릭터의 한계를 초월한다.
물론 이 영화가 정교하고 파격적인 면모를 겸비한 수작이란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저 신작에 대한 상찬으로 끝날 테지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일본의 거장들이 견지해온 단순한 도식화와 선악 대비 구도를 초과하는 성찰과 섭리를 계승한다.
거기에 '영상예술'만이 시도하고 도달 가능한 영역을 끊임없이 접목하는 가볍지 않은 도전의 최전선에 서 있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초기 작업부터 영화 속 인물과 배경을 통해 동시대 사회문제는 물로 역사적 배경과 상징에 대한 풍부한 인문학적 통찰을 선보인 바 있고, 즉흥적으로 출발한 본 작업에서도 그런 장기를 놓치기는커녕, 보다 거대한 소우주로 확장해낸다. 놀라운 세계관의 규모다. OTT 몰아보기로는 불가능한, 마치 과거 거장들의 시간 순서에 따른 진화를 목격하는 체험을 동시대에 겪는 기분이다. 마땅히 관객은 흥분하고 동료 창작자들은 자극받지 않을 수 없을 테다. 그리고 모두가 그의 차기작을 또다시 기다리게 될 테다.
<작품정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Evil Does Not Exist
2024│일본│드라마
2024.03.27. 개봉│106분│12세 관람가
연출&각본 하마구치 류스케
출연 오미카 히토시(타쿠미 역), 니시카와 료(하나 역),
코사카 류지(타카하시 역), 시부타니 아야카(마유즈미 역)
음악 이시바시 에이코 <드라이브 마이 카>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공/공동배급 (주)레드아이스엔터테인먼트
공동제공 ㈜키노라이츠
2023 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은사자상(심사위원대상),
국제비평가협회(FIPRESCI)상
2023 67회 BFI런던영화제 최우수작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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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