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 디셈버"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판씨네마㈜
영화의 제목인 <메이 디셈버>는 12달 중 특정한 2달을 조합한 구성이다. 'May'는 5월, 'December'는 12월이다. 한국어 번역으로는 감도가 떨어지지만, 영어 원문으로 보면 뭔가 동떨어진 느낌이 확 든다. 실제로 두 달은 각각 만발한 봄과 짙어가는 겨울을 상징하는 시기이다. 이 영어 관용구는 곧 나이 격차가 많은 커플을 가리킨다. '봄과 겨울 같은 관계'란 의미를 뜻하는 셈이다. 누가 봐도 그레이스와 조 커플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세간의 관심은 무엇보다 그들의 나이 차이에서 기인한다. 36살 중산층 가정의 청소년 자녀를 둔 성인 여성 + 여성의 아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10대 초반 소년이 단순한 감정 교감을 넘어 육체관계를 맺고 끝내 세상의 비난과 사법당국의 처벌을 감수하면서 결혼해 20여 년을 함께 한 상황은 온갖 구설수를 양산해 왔다. 지금은 시골 마을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지만, 과장 좀 보태면 모든 미국인이 이 사건을 기억할 정도다. 아마 세상의 편견은 두 가지로 구분될 테다. 첫 번째는 애욕에 눈이 돌아 아들 친구를 유혹해 성적 관계를 맺은, 멀쩡한 가정을 내팽개치고 바람난 여성의 성공적인 '가스라이팅'과 그 때문에 파괴된 '정상가족'의 비극으로 해당 사건과 당사자를 규정하는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남편 조는 그 당시 그레이스를 유혹한 건 정작 자신이었다고 말한다.
두 번째는 좀 더 복잡한 이야기다. 둘은 나이의 문제를 초월해 순수한 사랑을 했고, 그 결과 여러 불이익을 감내했으니 이제는 비록 곡절은 많았지만 평범하게 행복을 좇는 부부로 그냥 인정하면 된다는 낭만적인 시각으로 기울어지는 입장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 전제에 의구심을 품은 것 같다. 과연 온전히 두 사람이 20여 년 전 순수한 사랑으로 그 사단을 감행한 것일까? 영화는 엘리자베스가 던진 돌이 평온해 보이던 그레이스와 조 커플의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는 과정을 마치 각자의 입장을 공평하게 대변하듯 분배하며 순차적으로 전시한다. 그레이스는 겉보기엔 씩씩하고 차분하게 삶을 영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베이커리를 꾸리고, 직접 사냥을 즐기는 등 자기관리에 철저해 보인다. 찔러도 피도 안 나올 것처럼 효과적으로 엘리자베스의 의도성 질문을 방어하고, 가족관계도 주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볼 수 없되, 관객은 확인 가능한 찰나에서 그레이스가 겉보기엔 아주 효과적으로 위장술을 펼친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그레이스는 남편 조에겐 종종 불안한 기색을 내비친다. 남들이 보기엔 정서불안으로 보일 만큼 사소한 일에도 흔들리고 고통에 시달린다. 자기 운명을 당당하게 뒤바꾼 애정행각의 당사자란 타이틀 뒤에는 연약한 내면이 숨겨져 있다. 주변 인물들이 엘리자베스에게 들려주는 은밀한 비밀 또한 그런 반전을 뒷받침한다. 심지어 아들 조는 엘리자베스가 듣자마자 충격에 빠질 정도로 '센' 일화를 언급한다. 듣고 나면 그래서 그레이스가 그런 일탈에 빠지는구나 할 만큼 개연성이 성립된다. 하지만 그 일화의 진위는 누구도 당사자가 아니라면 확인 불가능한 경우에 속한다.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스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저 내용을 하나 더 알고 싶은 게 아니라 방송 드라마 출연으로 어느 정도 인지도를 쌓긴 했지만, 자신이 원했던 연기가 아니라 틀에 박힌 캐릭터로 그쳤다고 규정한 그는 정말 자신의 연기 인생 전기가 될 역할로 이번 영화를 소화하고 싶다. 그런 의지 때문인지 그는 제작사가 마련한 당사자들과의 교류 조건을 초과해 밀착하려 든다.
물리적 시간이나 제작환경 여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더 이 가족과 오래 붙어있으려는 엘리자베스의 집착은 단지 연기를 위한 것인지 관객을 헷갈리게 만들기 충분하다. 어느 순간부터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스가 되려는 것처럼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레이스와 같은 화장을 하고, 거북해하는 주민을 설득해 실제로 처음 이 부부의 정사가 발각된 펫숍 창고를 안내받아 실제로 성행위가 일어난 장소에서 자위행위와 함께 20여 년 전 그레이스를 홀로 재연해본다. 그레이스가 세간에서 허용하는 '선'을 넘은 것처럼 엘리자베스 역시 연기를 위한 사전 조사의 '선'을 넘어버린 지 오래다.
어떤 관객들은 마치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스의 위치를 침범하려는 것처럼 여길 테다. 연하의 남편이자 자신과 동갑내기인 조를 향한 엘리자베스의 관심은 자신이 연기에서 만나게 될 가상의 상대역을 향한 '그림자 권투'의 성격과 함께, 조에게는 다른 인생을 살 기회 혹은 자격이 있다며 자신이 마치 그를 구원의 천사처럼 갱생시키겠다는 욕망이 동시에 발현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런 엘리자베스의 태도는 마치 유혹하는 것처럼 성실한 남편이자 아빠로서 어린 나이에 안정된 가족을 지탱해온 조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흔들기 충분할 만큼 강렬하게 다가온다.
아름다운 나비가 탄생하기까지 인고의 과정 같은 인생의 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