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본문듣기

윤동주 시는 어떻게 일본 교과서에 실렸나

[TV 리뷰]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

24.02.15 14:08최종업데이트24.02.15 14:08
원고료로 응원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tvN STORY
 
윤동주(尹東柱, 1917-1945)는 일제강점기의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다. 너무나 짧은 생애를 살았고, 평생을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서 보내야 했던 비운의 문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특유의 감수성 및 삶과 시대에 대한 통찰이 녹아있던 윤동주의 작품세계는, 이후의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큰 이정표가 됐다.
 
또한 오늘날 그의 작품들이 해외에서도 사랑을 받고 심지어 일본의 교과서에까지 실리게 될 정도로, 윤동주는 시대와 국적을 넘어선 '불멸의 시인'으로 남게 됐다. 그런데 어쩌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질 뻔했던 윤동주의 시가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공개되기까지는 숨겨진 사연이 있었다.
 
2월 14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95회에서는 '숨겨뒀던 육필 원고의 기적, 윤동주의 시는 어떻게 일본 교과서에 실렸나' 편을 통하여 윤동주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작품세계를 조명했다.

17세 윤동주에게 찾아온 전환점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tvN STORY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 만주의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에는 지금도 윤동주 생가가 남아있지만 당국의 무관심으로 인하여 관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명동촌의 지명은 '동방의 나라, 한반도를 밝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당시 만주 북간도로 이주한 조선인 지식인들이 민족의 미래를 도모하자는 의미로 세운 마을이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던 신식학교에 기독교 중심의 공동체라는 교육적-종교적 특성으로 인하여, 명동촌은 사상적으로 깨어있는 공간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윤동주의 삶과 작품세계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모태가 되었다.
 
어린 시절의 윤동주는 정이 많고 섬세하며 친구들을 잘 챙기는 이타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손재주가 좋은 윤동주는 축구부원인 친구들의 유니폼을 본인이 모두 가져다가 직접 재봉질을 해줬다는 일화도 있다.
 
1934년 겨울, 17세의 윤동주에게 인생의 첫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윤동주의 사촌이자 평생의 절친이었던 송몽규가 중학생 신분으로 일약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쾌거를 이룬 것. 당시 문학도들에게 신춘문예 당선은 공식적인 문학가로 인정받는 등용문의 역할을 했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둘도 없는 절친이자 같이 문학을 공부한 학문적 동지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윤동주는 매사 자신보다 앞서나가는 친구에게 은근한 열등감과 경쟁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윤동주는 이때부터 시인의 길을 걷기로 다짐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동주는 송몽규의 당선소식을 듣고 무척 자극을 받았는지, 약 한 달여 만에 '초 한 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 등 무려 세 편의 시를 동시에 완성한다.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하나같이 진중하고 무거운 주제는, 당시 한창 청소년기를 지나던 윤동주가 불확실한 자신의 미래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던지고 자답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1930년대는 일본의 만주침략이 본격화되던 시기였고, 윤동주가 살던 북간도 일대는 조선인들의 항일무장투쟁이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청소년기의 윤동주가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과 일제의 잔혹함을 두 눈으로 생생히 목격한 것도 그의 시상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송몽규의 등단 이후부터 윤동주는 자신이 쓰는 시에 날짜를 적기 시작하는 특징을 보인다. 예술가들이 본인의 작품을 완성한 후 사인을 하는 것처럼, 윤동주 역시 이 무렵부터 본격적인 시인으로서의 자의식과 책임감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으로 해석된다.
 
윤동주의 부친은 아들이 의대나 법대에 진학하여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기를 원했다. 문학도가 되고 싶었던 윤동주는 "문과 졸업하면 신문기자밖에 더 되냐. 시는 의사가 돼서도 쓸 수 있는 것 아니냐"라고 꾸짖는 부친과 매일같이 충돌하며 부자 갈등이 매우 심각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윤동주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결국 보다 못한 윤동주의 할아버지가 중재에 나서면서 문과 진학을 허락받았다.
 
1938년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의 전신) 문과에 합격하여 경성(서울)으로 유학을 오게 된다. 시골 출신이었던 윤동주에게 다양한 세상과 학문을 접할 수 있는 신세계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대학 입학으로 처음으로 쓴 시 '새로운 길'이라는 작품에서는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라는 표현을 통해 새로운 세상에 첫 발을 내딛은 신입생의 풋풋함과 설렘을 느낄수 있다.
 
윤동주는 절친인 송몽규-강처중과 함께 이른바 '핀슨홀(Pinson Hall, 연세대 기숙사) 삼인방'을 형성하여 함께 대학생활을 보냈다. 비록 엄혹했던 시대였지만, 윤동주과 친구들의 인생에 가장 행복했던 청춘의 화양연화같은 시기였을 것이다.
 
이 시기의 윤동주는 학업에 충실하면서도 시 쓰기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윤동주는 '새로운 길' 등 8편의 시와 5편의 동시, 산문 '달을 쏘다' 등을 집필하며 활발하게 작품활동도 이어갔다.

학교 후배이자 절친한 문학적 동료였던 정병욱은 이 시기의 윤동주를 회고하며 "빼어난 미남이자 남을 헐뜯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또한 강처중은 "윤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지만 그의 방은 언제나 친구들로 가득차있었다"며 사람을 끄는 윤동주의 매력을 설명했다.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tvN STORY
 
그런데 윤동주가 3학년이 된 1940년, 그가 문학도로서의 꿈에 처음으로 회의를 느끼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면서 한국어 강의가 모두 폐지된 것. 당시 일제는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추구하며 조선어를 완전히 말살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 선교사가 세운 연희전문학교에서조차 더 이상 우리 말을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윤동주같은 문학도에게 언어를 빼앗긴다는 것은 곧 시상을 표현할 수단이 사라지는 것과 같았다.
 
이 당시 윤동주의 심경을 표현한 작품이 바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서시(序詩)'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는 내용을 통하여 순수한 이상이 외부의 시련에 위협받는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윤동주는 우리 말이 억압받는 참혹한 현실에 대한 분노를 펜으로 꾹꾹 눌러담으면서도, 고통조차 아름답게 노래하는 순수함에서 오히려 더욱 깊은 울림이 전해진다.
 
윤동주는 아예 우리 말로 써내려간 시집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이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윤동주의 대표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본이다.

정병욱의 회고록인 <잊지못할 윤동주의 일들>에 따르면 본래 윤동주가 생각한 가제는 '병원'이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현재 세상에는 환자들이 넘쳐나고 병원은 환자를 고치는 곳이기에, 시를 통해서나마 사람들을 치유하고 싶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윤동주는 자신처럼 아파하던 조선인들에게 위로를 전하며 한편으로는 독립에 대한 염원을 시로써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다.
 
미디어 매체가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에는 글을 쓰는 문인들의 영향력이 상당했다. 일제가 조선어 책을 불온서적으로 간주하던 상황에서 조선어 시집 발간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도전이었다. 윤동주가 존경하던 스승인 이양하 교수도 제자가 입을 피해를 걱정하여 강하게 만류했다.

결국 시집발간이 좌절되자 윤동주는 크게 낙담했다고 한다. 윤동주는 미리 제본해둔 세 권의 시집 중 한 편은 자신이 소장하고 나머지 두 편은 이양하 교수와 후배 정병욱에게 각각 한 권씩 선물했는데, 이는 훗날 오랜 시간이 흘러 중요한 유산으로 남게 된다.

석연치 않은 죽음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tvN STORY
 
한편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결정한다. 조선에서는 더 이상 문학을 공부할 공간도 방법도 남아있지 않았던 윤동주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일본으로 가기 위해서는 창씨개명(일본식 이름으로의 개명)을 해야만 했다. 고뇌하던 윤동주는 일본 출국 직전에야 창씨개명서를 제출했다. 또한 윤동주는 창씨개명을 하기 며칠 전에 지은 '참회록'을 통하여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서의 비통함과 반성을 드러냈다.
 
'참회록'의 육필 원고에는 당시 윤동주의 고뇌를 보여주는 흔적들이 남아있다. 윤동주는 '비애금물', '생존', '도항증명' 등의 여러 단어가 적힌 낙서를 끄적이며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항상 깔끔하게 정리되었던 윤동주의 다른 작품 원고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흔적이다.
 
1942년 윤동주는 복잡한 심경을 안고 일본 도쿄의 릿쿄 대학에 입학한다. 하지만 제국주의의 광기에 휩싸인 일본에서의 대학생활은 평탄하지 못했다. 전시 체제라는 이유로 윤동주는 입학하자마자 단발령이 내려져서 강제로 머리를 깎아야 했고, 교련수업으로 무기와 제식훈련을 받기도 했다.
 
이 당시 쓰여진 '쉽게 쓰여진 시'에서는 억압적인 분위기의 대학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힘겨워하는 윤동주의 심경을 읽을 수 있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유학 당시 윤동주기 지내던 방)은 남의 나라"라는 표현에서는 암울한 시대에 제국주의의 심장 도쿄에서 지내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과 반성이 녹아있다.
 
결국 윤동주는 도쿄를 떠나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편입한다. 교토는 도쿄보다는 사상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였고 절친인 송몽규도 교토제국대학에 재학중이라서 윤동주는 다소 마음의 위안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윤동주에게 생각지 못한 뜻밖의 나비효과를 불러온다.
 
1943년 7월 10일, 윤동주는 돌연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전격 체포된다. 사실 송몽규는 이미 일본경찰에게 불령선인(식민통치에 반대하는 불온한 조선인)으로 낙인 찍힌 상태였고, 송몽규와 가까운 사이이던 윤동주도 교토에 오게 되면서 덩달아 감시대상에 오르게 된 것. 일본 경찰은 윤동주가 송몽규를 비롯한 조선인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조선 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을 두고 테러를 기획했다는 죄목을 뒤집어씌웠다.
 
사실 원래라면 가벼운 훈계나 학교 징계로 넘어갈 수도 있었던 사안이었지만, 당시 전시체제였던 일본 사회에서 강화된 '신 치안유지법'으로 처벌대상이 된 윤동주는 조선어로 시를 쓴 죄, 조선 문화의 향상에 힘썼다는 죄목으로 끝내 2년형을 선고받기에 이른다. 남의 나라까지 와서 육첩방보다 작은 감방에 억울하게 갇히게 된 윤동주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약 1년 7개월 동안 수감 생활에서 건강이 악화된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향년 27세의 나이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안타깝게 요절하였다. 꿈에 그리던 한반도의 광복을 불과 반년 앞둔 시점이었다.
 
일본 측이 밝힌 윤동주의 사망원인은 뇌일혈이었다. 건강하던 20대 청년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석연치 않은 의혹을 자아냈다. 그런데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던 그의 당숙은, 송몽규와 조선인 죄수들이 시약실에 끌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약물을 강제로 주사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한다.

윤동주가 사망한 지 한 달 만에 송몽규도 같은 곳에서 절명한다. 이를 두고 윤동주를 비롯한 조선인들이 일제 생체실험의 대상으로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현재는 관련 증거가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다.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tvN STORY
 
유족들은 윤동주의 시신은 돌려받았지만 그가 남긴 소지품과 글들을 돌려받지 못했다. 그렇게 윤동주의 시는 세상에서 잊혀지는 듯했다.
 
그런데 해방 이후 3년이 지난 1948년 1월 30일 윤동주의 시집이 한국에서 발간된다. 윤동주가 후배 정병욱에게 선물했던 미출간 육필 원고가 뒤늦게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 정병욱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4년 학도병으로 전장에 끌려가면서 전남 광양에 있던 어머니에게 윤동주의 원고를 맡기며 잘 보관해달라고 부탁했던 것.
 
훗날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까지 오른 정병욱 선생은 회고록에서 "내 평생 해낸 일 중 가장 보람있고 자랑스러운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려줄 수 있게 한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할 만큼 윤동주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드러냈다.
 
또한 핀슨홀 3인방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강처중은, 윤동주가 일본으로 떠나면서 남긴 책과 연희전문학교 졸업앨범 등을 평생 목숨처럼 간직했다고 한다. 강처중이 일본 유학시절의 윤동주로부터 편지로 받은 시 12편과 정병욱이 간직한 시집에 수록된 19편을 모아 발간한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최종본이 됐다. 윤동주가 생전 그토록 바랐던 우리말 시집은, 그의 사후에 나마 광복을 맞이한 대한민국에서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놀랍게도 윤동주의 시는 훗날 시간이 흘러 1990년 일본 교과서에까지 등장한다. 어떻게 일본에 맞선 저항시인인 윤동주의 시가 일본 교과서에 수록될 수 있었을까. 일본의 전후문단을 대표하는 거장인 이바라기 노리코(1926-2006)는 자신의 수필 '한글로의 여행'에 윤동주를 소개했다. 이 작품이 일본 교과서에 수록되며 윤동주의 존재와 작품도 자연히 알려지게 된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역사 교과서도 식민지배나 침략에 대하여 인정하기 시작하며 달라진 사회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다.
 
이바라기는 윤동주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며 "만일 그가 반년만 더 생존했더라면 전후의 고국에서 즉시 선두의 활동을 시작할 인물이었을 것"이라며 높이 평가한 바 있다. 교토 도시샤 대학에 건립된 윤동주의 추모비에는 지금도 많은 일본인이 찾아와 윤동주를 추모한다고 한다. 2023년 윤석열 대통령의 영국 국빈 방문 만찬 당시 국왕 찰스3세는 윤동주의 시 '바람이 불어'를 영어로 낭독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외국인의 시선에서 봐도 윤동주의 시가 주는 울림이 남달랐다는 것을 알수 있다.
 
"가슴속에 하나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윤동주의 대표작 '별 헤는 밤'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암울했던 시대에 문학으로서 세상의 빛을 밝히고자 했던 청년 윤동주가 겪었던 삶과 꿈, 고뇌의 사색들은 지금도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전해주고 있다.
벌거벗은한국사 윤동주 저항시인 별헤는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