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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구한 철의 여인, 혹은 신자유주의의 마녀

[리뷰] tvN <벌거벗은 세계사>

24.02.14 18:00최종업데이트24.02.1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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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1925-2013)는 영국 제71대 총리로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이기도 하다. 철의 여인(The Iron Lady) 별명으로도 유명했던 대처는 무려 11년 6개월간 영국을 통치한 장수 총리였다.
 
그녀는 파격적인 정책과 강력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영국병'을 타파한 영웅이자 여성의 리더십을 증명한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또다른 한편에서는 차갑고 냉혹한 태도로 영국 사회를 분열시키고 나락으로 떨어뜨린 마녀라는 상반된 악평도 동시에 받고 있다. 과연 대처의 진짜 얼굴은 무엇이었을까.
 
2월 13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38회에서는 '영국병을 타파한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의 두 얼굴'편을 통하여 영국 현대사를 바꾼 대처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박은재 한림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대처의 일대기
 
대처는 1925년 링컨셔 그래섬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던 전형적인 영국 중산층 가정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대처의 부친 알프레드 로버츠는 시의원으로도 활동했고, 당시로는 드물게 딸인 대처를 어릴 때부터 자신이 참석하는 정치 행사마다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대처는 10대의 어린 나이부터 일찌감치 정치인이 되겠다는 포부를 간직한 소녀로 자라났다.
 
1943년 대처는 영국 정치인들의 필수코스로 꼽히는 명문대 옥스퍼드 대학의 서머빌 칼리지에 입학한다. 대처는 학내 보수당 지지모임인 옥스퍼드 보수당협회(OUCA)에 가입하여 회장까지 역임하며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대학 시절의 대처는 공부도, 정치 활동도, 심지어 연애에도 늘 최선을 다하는 만능 열정녀이자 '엄친딸'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젊은 날의 대처는 뛰어난 미모로도 유명했다. 대학 시절에 육군 생도로 대처와 교제했던 토니 브레이는 "대처는 패션감각이 뛰어났고 멀리서 봐도 눈에 띄는 여성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대처는 대학 졸업후 일단 생계를 위하여 한 플라스틱 회사에 취업했지만 정치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보수당의 당원으로 가입한 대처는 불과 24세의 나이에 런던 남동부의 공업도시인 다트퍼드 지역의 하원의원으로 첫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한다.
 
하지만 대처의 등장은 당시 영국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다트퍼드는 노동당이 압도적인 강세를 보인 지역이었고, 보수당 출신이 당선될 가능성이 사실상 전무했다. 당시 보수당이 무명의 정치 초보이자 여성인 대처를 후보로 낙점한 이유도, 당선 가능성보다는 대처의 예쁜 미모와 여성이라는 희소성을 부각시켜 화제몰이라도 하려는 의도에 가까웠다.
 
하지만 대처는 그저 남성들이 짜놓은 정치판에서 치어걸에 머무르려고 하지 않았다. 대처는 '가정주부식 경제이론'을 주장하며 "정부는 가정주부가 돈이 모자랄 때 하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정부도 가정주부처럼 가계부를 들여다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찾아내야 한다"고 비판하여 정부가 부채를 줄이기 위해서는 가정주부(여성)의 지혜를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만해도 정치에서 차별받고 소외당하던 여성들은, 할말 다하고 똑부러진 대처의 등장에 환호했다. 대처는 당시 영국 사회에서 정치인으로서 여성이 가질수 있는 약점으로 오히려 자신만의 장점으로 승화시켰다.
 
비록 선거 결과는 낙선이었지만, 보수당은 지난 선거에 비하여 지지율이 크게 상승하며 대처 효과를 확인했다. 이때부터 보수당은 대처의 열정과 추진력, 뛰어난 전략을 눈여겨보기 시작한다.
 
대처는 이후 재력가 가문이었던 데니스 대처와 결혼하면서 우리가 아는 마거리 대처로 불리게 된다. 부유한 남편과의 결혼으로 경제적 부담에서 벗어난 대처는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에만 매진할 수 있게 됐다. 남편 데니스는 '조용한 바보'라는 별명으로 불릴만큼 평생에 걸쳐 아내의 정치활동을 묵묵히 외조하면서 대처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줬다. 
 
1959년 34세의 대처는 정치인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다시 한번 선거에 도전했고 이번에는 보수당의 절대 강세지역인 런던 북부의 핀칠리 지역구에 출마하여 의원으로 당선된다. 이후 능력을 인정받은 대처는 보수당에서 여러 요직을 맡으며 승승장구했고, 1970년에는 45세의 나이에 교육부 장관의 자리까지 오른다.

당시 영국은 큰 위기에 빠져 있었다. 최강대국의 지위를 미국에서 빼앗긴데 이어, 유럽과 일본에게도 밀려 제조업과 산업이 침체에 빠져 경제가 흔들리고 있었다. 높아진 물가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노동생산성저하로 사회 분위기는 활력을 잃어갔다. 1970년대 영국을 강타한 경제 침체와 사회 전반의 무기력한 분위기를 가리켜 '영국병'이라는 용어까지 탄생했다.
 
당시 영국 정부는 심각한 재정난으로 대처가 장관으로 재직하던 교육부의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대처는 예산절감을 위하여 어린 아동들에게 지급하던 2차대전시절부터 이어온 우유 무상 급식 제도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대처는 무상급식 폐지로 절감한 비용을 교육 시설물 증대와 교원 충원에 활용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동안 '모성애 강한 어머니'의 이미지를 정치적 자산으로 삼아왔던 대처의 결정에 많은 이들은 엄청난 실망과 배신감을 느끼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이 사건으로 그녀에게는 '우유 강도'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대처는 비난 여론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대처는 보수당 당대표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한다. 당시만 해도 보수당 당대표는 상류층 출신의 남성들이 주도하는게 관행이었고, 남편 데니스마저 무모한 짓이라고 대처의 출마를 만류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초 보수당의 유력 당대표 후보였던 키스 조지프가 여성 비하와 하층계급 차별에 대한 '피임법' 망언으로 뭇매를 맞고낙마하게 되면서, 대처에게 행운의 기회가 돌아왔다. 대처는 보수당 대표선거에서 276표중 146표를 얻으며 당당히 영국 최초의 여성 당대표에 선출됐다.
 
총선을 통하여 승리한 당대표가 총리를 맡는 영국의 정치 시스템에서, 보수당의 당대표가 되었다는 것은 곧 총리로 가는 지름길을 의미했다. 대처가 당대표에 오른지 4년 만인 1975년 5월 총선에서 보수당이 635석 339석을 차지하는 승리를 거두면서, 대처는 마침내 영국 최초의 여성총리 자격으로 '다우닝가 10번지(영국 총리 관저)'에 입성하게 된다.
 
당시 대처는 총리 당선 소감으로 "불화가 있는 곳에 조화를, 잘못이 있는 곳에 진실을,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가지게 하소서"라는 말을 영국 국민에게 전하면서 "우리가 영국 국민임을 모두가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자"고 당부했다.
 
대처의 별명으로 유명한 '철의 여인'이라는 수식어를 처음 지어준 것은 사실 영국이 아니라 소련에서 시작되었다. 대처는 당대표 시절 소련의 군사력 증강을 크게 비판한 일이 있었는데, 소련의 한 군사잡지에서 대처를 비꼬는 의미에서 '철의 여인이 위협을 휘두른다"는 표현을 쓰며 조롱했다.
 
하지만 대처는 오히려 이 별명이 마음이 들었는지, 공개석상에서 "네, 저는 철의 여인이 맞다. 철의 여인이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영국은 이제 철의 여인을 필요로 한다"이라고 지칭하며 쿨하게 인정했다. 대처는 총선에서 이러한 '강한 여성'의 이미지를 선거유세에 적극 활용하여 오히려 큰 수혜를 입었다. 이미지메이킹에 능한 정치인 대처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대처의 '철의 여인'다운 면모
 
실제로도 대처는 총리 취임 이후 '철의 여인'다운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대처는 영국병을 타파하기 위한 대대적인 개혁에 나선다.
 
대처가 무엇보다 주목한 것은 파업과의 전쟁이었다. 당시 영국은 노동자들의 빈번한 대규모 파업이 만성적인 사회문제로 자리잡고 있었다. 1978-79년 영국에 역대급 한파가 찾아온 가운데 중동발 오일쇼크와 물가 상승의 위기 속에 또다시 각계 노조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대규모 파업을 벌였다.

파업으로 공장과 발전소는 물론이고 난방을 못하게 된 학교나 병원 등 공공기관까지 일제히 문을 닫았다. 1979년 1월에 이르러 파업은 사회 각 분야로 급속히 확대되며 약 150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동참했다. 2-3주에 걸쳐 지속된 파업으로 영국 전역은 마비되고 사실상 무정부 상태의 혼란에 이르게 된다.
 
특히 파업의 여파가 가장 컸던 분야는 탄광 산업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영국 사회에서 석탄 산업의 비중은 엄청나게 높아졌지만 구조적으로 누적된 문제가 심각했다. 영국의 많은 광산들은 엄청난 적자속에서도 정부의 지원 속에서 운영되고 있었다. 반면 광부들의 현장 근무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노조중에서도 가장 영항력있던 탄광 노조의 파업은, 영국 사회에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었다. 
 
대처는 강력한 구조조정을 선포하며 생산성이 떨어지는 20여곳의 탄광을 과감하게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대량 실직의 위기에 놓인 노조는 격렬하게 반발했고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로까지 확신됐다. 2001년 개봉한 영국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는 당시 파업과 영국 노동자들의 실상이 잘 묘사되어 있다.
 
대처 정부는 탄광 노조의 파업에 강경하게 대처했다. 이미 치밀하게 대책을 준비한 대처는 파업기간 동안 대체할 비노조원 운수노동자와 석탄을 확보했고, 유사시 해외로부터 석탄 수입계획까지 세웠다. 또한 대처는 파업을 주도한 시위대에 경찰 기마대까지 투입하여 강경진압했다. 이를 비판하는 여론에 대하여 대처는 "다음에는 그런 일이 있으면 기마대가 아니라 탱크를 보낼 것"이라고 일축하며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대처는 "법의 지배를 폭도에 대한 지배로 대체하려는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탄광노조는 영국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는 적극적인 언론플레이로 파업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부추기면서 탄광노조를 압박했다. 대처 정부의 강경 대응으로 시위대중 1만명 이상이 체포되고 8천 명가량이 유죄 선고를 받았다. 1년여간 이어진 파업 사태는 사실상 대처의 승리로 끝났고, 대처 정부는 최초로 탄광노조를 제압하는데 성공한 정부가 됐다.
 
자신감을 얻은 대처는 이어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노선의 경제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대처는 '공기업의 민영화' 정책을 추진하며 규모가 큰 공기업들을 대거 매각했고 약 334억 9천700만 파운드(현재 한화 가치로 141조 400억)이라는 막대한 수익을 올린다. 이로써 영국 정부는 오랫동안 시달려온 부채를 탕감하고 재정을 개선할 수 있었지만, 반면에 민간 기업으로 넘어가면서 실직자가 급격히 증가하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이러한 대처의 정책이 적절했는지, 당대부터 현재까지도 그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린다.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대처는 영국이 망해가는 것을 막았다. 파산하는 영국의 상황을 반전시켜 일으켜 세웠다"고 평가하는 반면, 부정적인 이들은 "대처의 시장정책은 회색빛 악을 구현한데 불과하다. 그녀의 정책으로 고통받은 것은 광부들만이 아니라 노동자 계층 전체"라고 비판한다. 대처를 두고 '영국병을 타파한 능력있는 총리'VS '신자유주의의 마녀'라는 상반된 평가가 지금까지도 공존한다.
 
대처를 싫어한 것은 노동자 계층만이 아니었다. 대처는 영국 왕실과의 관계도 좋지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내각책임제인 영국에서 왕실이 대처 정부의 정책을 공공연하게 비판하는 듯한 모습이 여러 차례 나온 것도 이례적이었다.
 
당시 국왕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비슷한 동년배이고 여성 지도자라는 연결고리에 불구하고 대처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 일화에는 엘리자베스2세가 "그녀(대처)가 오늘은 또 어떻게 내 백성을 괴롭힐까요?"라고 뒷담화를 했다는 내용도 전해진다.

대처 역시 엘리자베스2세를 은근히 견제했고, 함께 서는 공식 석상에 있을때마다 여왕이 어떤 옷을 입고 나오는지 철저히 확인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같은 색상의 옷을 입고 나오는 일이 절대 없었을만큼 패션을 두고 자존심 경쟁을 벌였다.
 
당시 지지율 급락으로 위기에 처했던 대처는 1982년 아르헨티나와 '포클랜드 전쟁'을 통하여 다시 한번 반전에 성공했다. 대처는 포클랜드 전쟁의 승리로 이끌며 1983년 총선에서 보수당의 승리를 이끌고 다시한번 총리직을 이어나가게 됐다. 파업진압-민영화에 이어 대처가 주목한 것은 복지였다.

대처는 "정부의 복지확대는 국민의 의지를 꺾는 나쁜 복지"라고 규정하며 "복지는 자립적으로 생활할 수 없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복지정책 개편을 밀어붙였다.
 
대처는 집없는 서민들이 값싼 임대료를 내고 거주하던 공공주택을 개인에게 매각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돈없는 서민들의 주거불안은 심화되었고 빈부격차가 더 벌어지는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대처의 연이은 개혁정책으로 영국은 침체기를 벗어나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이처럼 대처는 여러 가지 논란속에서도 경제 발전을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1987년 62세로 나이로 세 번째 총리를 역임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이때부터 대처의 본격적인 몰락도 시작됐다.
 
대처는 당시 유럽연합 참여 문제를 놓고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하다가 보수당 내부에서도 지지를 잃기 시작했다. 여기에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 묵인하고 무역제재로 동참한 것과, 사고뭉치였던 아들 마크 대처를 둘러싼 스캔들까지 불거지며 여론이 점점 악화됐다. 결정적으로는 무리하게 인두세(소득이나 재산이 아닌 사람의 머릿수대로 세금을 부과하는 것) 추진을 강행하려다가 영국 사회의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면 사면초가에 몰렸다.
 
1990년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고 보수당내에서도 등을 돌리는 상황이 되자, 65세의 대처는 결국 여론을 이기지 못하고 사임을 발표하면서 11년 6개월간의 총리직을 내려놓고 정계를 은퇴하게 된다.
 
대처는 은퇴후 뇌졸중판정을 받았고 10년 넘게 투병하다가 2013년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대처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지만, 한편에서는 '마녀가 죽었다'며 오히려 환호하고 축하 퍼레이드를 벌인 이들도 많았다. 이후 곳곳에서 대처를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졌지만, 시민들의 테러로 멀쩡하게 남은 것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대처를 미워하는 영국인들도 많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누구도 다른 사람과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능력을 자신이 선택한 데로 계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처가 남긴 격언이다. 호불호가 엇갈리지만 대처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여성 정치인으로 세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인은 분명하다. 그녀가 남긴 수많은 유산과 과오들은 오늘날까지 현대 정치의 논쟁적 이슈들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되고 있다.
벌거벗은세계사 철의여인 마거릿대처 영국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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