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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삯 공짜' 고향 가던 길 폭발한 배... 목격된 수상한 정황들

[TV 리뷰]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4.01.26 17:38최종업데이트24.01.26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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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1945년 '우키시마호 참몰사건'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하던 다수의 한국인들을 태운 배가 해상에서 의문의 폭발로 인하여 침몰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공식적인 한국인 피해자만 500여 명에 이르지만 실제는 수천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반도가 막 광복의 기쁨에 젖은 지 얼마되지 않아 벌어진 이 충격적인 비극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의혹을 남긴 채 말끔히 해결되지 못한 상처로 남아있다.
 
1월 25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12회에서는 '부산행, 우키시마호 침몰 미스터리'편을 조명했다.
 
2012년 5월. 부산에 거주하던 베테랑 잠수사 이응구씨는 유족 한영용씨로부터 우키시마호 폭침에 대한 수중현장조사를 의뢰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현장에 투입된다. 이 깊은 바닷속까지 한국인이 직접 찾아온 건 67년 만에 처음이었다. 잠수사들은 최선을 다해 바다 밑을 탐색했지만 안타깝게도 별다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유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응구씨는 "너무 늦게 왔다"고 생각했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수중조사가 별 소득없이 끝나고 다시 10여 년이 흐른 2023년 9월. 부산에 거주하던 전병관씨 부자는 우연히 신문을 보다가 '우키시마호 생존자를 찾습니다'라는 기사를 접하게 된다. 전병관씨의 부친 전영택씨는 올해 98세로 놀랍게도 우키시마호의 생존자이자 최고령이었다. 전영택씨는 그동안 아들과 가족들에게도 우키시마호 사건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마지막 증언일지 모른다는 심정으로 거의 80년 만에 그날의 일을 털어놓았다.
 
의문의 폭발과 희생된 조선인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사건은 1945년 8월 22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이 2차대전에서 연합국에 패망하며 한반도가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지 약 일주일 만이었다. 일본의 북단 아오모리현에 위치한 오미나토항구에서는 조선인들을 위한 귀국선이 만들어졌다.
 
일본 해군은 고향으로 보내주겠다며 아오모리현 일대에 거주하던 한국인(조선인)들을 모집했다. 심지어 '뱃삯은 공짜'라는 파격적인 조건까지 덧붙였다. 강제동원된 노동자들을 비롯하여 저마다 다양한 사연을 지닌 수천여명의 한국인이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항구에 집결했다. 그중에는 전영택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영택씨는 승선을 앞두고 수상한 정황을 목격했다. 같이 일했던 작업반장은 불편한 표정으로 '배가 위험하니 타지말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영택씨는 결국 배에 승선했고 어마어마하게 몰린 인파의 규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귀국선의 이름은 우키시마호, 한자로는 '부도환(浮島丸)'이라고 쓰며 '떠다니는 섬처럼 큰 배'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4730톤급의 우키시마호는 2200명의 승객을 태우고 15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유명한 타이타닉호와 비교하면 10분의 1 정도의 크기였지만, 탑승객은 확인된 숫자만 타이타닉호의 두 배에 가까운 4000명에 이르렀다. 일본 해군 승조원 255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3700여 명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객실은 일본군들이 차지했고, 한국인들은 2, 3층 선창 맨바닥의 덥고 비좁은 공간에 빽빽하게 몰려있어야 했다. 예상 항해 기간은 4일이었고, 8월 25일 아침에는 부산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한국인 승객들은 온갖 불편을 감수하며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쁨을 위안으로 삼았다.
 
그런데 출항한 지 3일이 지난 8월 24일 오후 5시, 탑승자들은 육지에서 일본 주택들이 목격되는 것을 보고 배가 아직도 일본 연안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배가 도착한 곳은 부산이 아닌 일본의 마이주르만이라는 지역이었다.
 
탑승객들이 이상한 정황에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우키시마호는 항구로 이동했다. 그리고 육지와의 거리를 불과 500미터 앞두고 속도가 점차 느려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배가 두 동강이 나 버렸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갑판 위에 있던 사람 수백 명은 바다 위에 그대로 떨어졌다. 또한 갑판 아래 선실마다 수천 명이 들어차있던 탑승객들은 필사적으로 위로 올라오기 위하여 아우성을 쳤지만 선체는 점점 더 기울었고 배 아래쪽에선 바닷물이 밀려 들어왔다. 서로 밀치고 떨어지면서 배 안은 순식간에 비명과 울음소리로 가득한 생지옥이 펼쳐졌다.
 
"바다 밑을 보니까 기름이 터져서 새까맣게 있고 사람들이 막 빠져서 꼭 미꾸라지 소굴처럼 그렇더라.", "죽어서 자빠지는 사람도 있지, 팔딱팔딱 하며 살려달라 소리지르는 사람도 있지. 얼굴이 흉측해서 사람 같지도 않고 형편없었다. 말할 것도 없이." 생존자들이 목격한 당시의 참상이다.
 
다행히 인근마을에서 주민들이 해군의 구조요청 신호를 듣고 고깃배를 몰고 달려왔다. 갑판에서 버티고 있던 최억조씨의 일곱식구와 전영택씨 등은 구조를 받아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살기 위하여 바다에 뛰어내린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사망했다.
 
사고 지점은 육지에서 가까웠기에 수심이 깊지는 않았다. 배가 완전히 침몰한 후에도 이렇게 돛대 부분이 계속 올라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스스로 헤엄쳐 나오거나 어민들이 구조해낸 사람들보다 안타깝게도 희생자들의 숫자가 월등히 많았다. 사고 일주일 만에 바닷속으로 빨려들어간 사람들의 시신이 하나 둘 해안가로 떠밀려 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경악스럽게도 일본 측은 희생자들에 대한 신원 확인도, 제대로 된 장례 절차도 없었다. 생존자들은 일본인들이 "시신을 새끼줄을 가지고 목을 줄줄 엮어서 끌어갔다"고 충격적인 증언을 전했다. 시신은 기름에 덮어 씌워서 누가 누군지 절대 찾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바닷가엔 가족들의 시신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통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우키시마호 참사는 사건이 벌어진 이후 오랫동안 잊혀져왔다. 하지만 사고 후 거의 반세기가 지난 1990년, 우키시마호 침몰에 대한 미스터리가 뒤늦게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다.
 
당시 평범한 병원 임상병리사였던 전재진씨는 1990년 행사차 일본에 방문했다가 아오모리현에서 우연히 우키시마호 사건을 듣게 됐다. 당시만 해도 우키시마호 사건은 일본에서 유명했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재진씨는 이렇게 큰 사고가 왜 알려지지 않았는지 의문을 품었고, '우키시마호 폭침 진상규명회'를 조직하여 생존자를 찾기 위한 활동에 나섰다. 오랜 세월 동안 정부와 민간을 통틀어 이 사고를 조사한다고 먼저 나선 인물은 전재진씨가 최초였다.
 
재진씨의 노력으로 83명의 우키시마호 생존자를 찾을수 있었고, 그들은 당시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50년 세월이 지났는데도 생존자들은 죽다 살아났거나 가족을 잃은 아픔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재진씨는 "일단은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사건은 참으로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 하고 있었다. 기억에 많이 남는다. 참으로 처절했다"고 회상했다.
 
"사람들을 짐짝처럼 실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당시 우키시마호의 행적에는 많은 미스터리가 존재했다. 당시 한국인들이 서둘러 배에 올랐던 이유는 일본군이 '이 배가 한국으로 가는 마지막 배'라고 선전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키시마호는 일본 전역을 통틀어서 마지막이 아니라 급조된 첫 번째 귀국선이었다. 일본이 패망 후에 공식적인 한국 귀국선을 띄운 건 9월 중순부터였다.
 
우키시마호는 민간선박이었으나 1941년부터 해군 소속으로 바뀌면서, 무기를 싣는 함선으로 바뀌었다. 도미우리 함장과 255명의 일본 승조원 대부분이 해군 소속이었다. 구조되어 목숨을 건진 함장은 우키시마의 폭발 원인이 기뢰와의 접촉 때문이라고 상부에 보고했다.
 
사고가 난 장소는 왜 부산이 아닌 마이즈루만이었을까. 우키시마호가 출발한 오미나토항은 원래 부산에 가는 배가 없던 곳이라 정확한 항로는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에서 부산을 가기 위해서는 동해를 가로지르는 것이 가장 빠른 코스였다.

그런데 항구를 출발하고 3일 내내 일본의 해안선이 멀어지지 않고 옆으로 계속 보이며 승조원들도 항로에 대하여 의아해했다고 한다. 도미우리 함장은 사고 이틀 전 "8월 24일 저녁 6시 이후에는 항해하지 말고 가까운 항구로 들어갈 것"이라는 명령을 받고 그대로 따랐다고 주장했다. 
 
1954년, 우키시마호가 침몰된 9년 뒤에야 배 전체가 인양됐다. 선체 안에서만 수백 구의 유골이 발견됐다. 그런데 선체 내부를 촬영한 사진에서 새로운 의혹이 발견됐다. 배 바깥에 있던 기뢰와 부딪혀서 폭발이 일어났다면, 선체가 밖에서 안쪽을 향해 찢긴 흔적이 있어야한는데, 그 반대로 드러났다.
 
당시 배 안에는 기관총, 대포 같은 무기들이 실려있는 화약고와 탄약고도 있었다. 생존자들은 이를 두고 폭발이 외부가 아닌 배 안에서부터 시작됐을 수도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생존자들이 기뢰 폭발이라는 일본 발표를 불신하게 된 또다른 이유는 사상자에 대한 집계였다. 일본 해군은 사고 일주일 만에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일본인 승조원 255명 중 25명 사망, 한국인은 3735명 중 524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라진 몇천 명의 한국인들에 대한 신원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승선할 때 아무도 이름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우키시마호에 누가, 몇 명이 탔는지, 정확한 숫자와 명단을 파악할 수 없는 상태였다. 심지어 생존자가 사망자로 이름이 올라가는 어이없는 사태도 벌어졌다.
 
생존자들이 추정하는 그날 탑승객은 최소 5000명에서 8000명 사이였다. 이 중 구조되거나 탈출한 사람은 많게 잡아야 1000명 내외였다. 심지어 생존자였던 한 일본인 승조원도 이를 인정하고 "사람들을 짐짝처럼 실었다"라고 증언한 바 있다.
 
생존자들의 증언과 정황을 토대로 실제 사망자 수는 최소 4000명에서 7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더 놀라운 것은 일본이 사고 규모를 축소한 것은 물론, 일부러 배를 폭발시켰다는 의혹까지 제기된 것이다.
 
또한 생존자들은 사고 당일을 전후하여 일본 해군의 수상한 행적을 증언했다. 사고가 나기 얼마 전 일부 승조원들이 물을 보급한다는 핑계로 구명정을 타고 배를 빠져나가는 것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떠나고 한참 후에 배는 폭발했다.
 
일본이 진짜 두려워했던 것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1977년 우키시마호의 도미우리 함장과 승조원들이 한 TV 방송에 모습을 드러내어 세상을 놀라게 한 충격적인 증언이 등장한다. 놀랍게도 함장과 승조원들은 갑작스럽게 조선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반발했다고 한다.
 
함장은 "우리는 오미나토는 떠나지만 부산으로는 안 간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마이즈루로 갔다. 조선인들 중에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라며 황당한 이야기를 늘어놓아 분노를 자아냈다. 또한 일본측 공식자료에 따르면 당시 급조한 귀국선을 무리해서 만든 이유에 대하여 '한국인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여 빨리 조선으로 보내주려 했다'는 핑계를 내세웠다.
 
사실 일본이 진짜 두려워했던 건 따로 있었다. 아오모리현은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일본이 전투기지를 건설했고 유독 많은 한국인이 강제 동원된 상태였다. 이 지역에서 일본은 소련군의 진출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이었고, 유사시 수천명의 조선인들이 소련군에 합세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가 제기되었다고 한다. 일본으로서는 그동안 강제로 부려먹은 조선인들이 위협적인 존재가 될 것이 두려워 최대한 빨리 많은 조선인들을 내보내야겠다고 판단했다면 개연성이 맞아떨어진다.
 
우키시마호의 함장과 승조원들이 이 출항 명령에 거부감이 심했던 이유도 따로 있었다, 전쟁이 끝났어도 바다 여기저기에는 미군이 투하한 기뢰가 깔려서 위험했던데다, 부산에 갔다가 자칫 포로로 붙잡힐 수도 있다고 두려워했던 것이다. 일본해군 사령부는 사형을 시킬 수 있다고 함장을 위협해가며 사실상 배를 억지로 출항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함장과 승조원 중 단 한 명도 부산까지 항해를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없고, 심지어 부산으로 가는 길도 몰랐다는 것이 드러났다. 우키시마호가 왜 알 수 없는 항로로 움직였는지, 함장은 왜 목적지에 대하여 정확한 답변을 거부했는지 짐작되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정작 우키시마호에 탑승했던 한국인들만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게 더 큰 비극을 불렀다.
 
1992년 15명의 생존자와 유족들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50년 만에 소송을 걸었다. 장장 12년에 걸친 법정 공방 끝에 대법원 판결에서 나온 결과는 안타깝게도 '패소'였다. 폭침된 사실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배상할 수는 없다. 증언을 뒷받침할 물적 증거가 없어서 자폭이라는 주장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수천 명의 한국인이 자신들이 운명을 모른 채 우키시마호에 탔고, 그 배와 함께 침몰했는데. 지금껏 그 누구도 사과를 하거나 책임을 진 사람은 없었다. 미군 기뢰에 의해 배가 폭발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 부분조차도 규명이 불가능한 것은 마찬가지다. 애석하게도 시간이 너무 지나 현장 영상이나 사진같은 증거는 남아있지 않다. 일본도 한국 정부도 진상규명을 위하여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의혹에 대한 유일한 증거는 생존자들의 기억 뿐이었다. 우키시마호 희생자 한석희씨의 아들 한영용씨는 세 살에 떠나보낸 아버지의 유해를 지금까지도 찾고 있다. 우리나라도 일본도 그 누구도 하지 않기에 개인이 나서서 유골만이라고 찾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

우키시마호의 폭발이 기뢰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음모 속에서 벌어진 사건인지. 아직까지도 정답은 알 수 없다. 그리고 현재 생존자는 세 분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존자들이 그날을 증언할 때 공통적으로 말했던 트라우마는, 물에 빠져 허우적댈 때 살기 위하여 구해달라고 애원하는 옆 사람의 손을 뿌리치고 나와야 했던 기억이다. 생존자의 가슴에는 아직도 큰 돌처럼 얹혀 있는 상처라고 한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이후의 삶도 대부분 평탄하지 못했다.
 
지난해 2월, 수십년 만에 처음으로 유골 12구의 소재지가 파악됐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그곳은 바로 배의 원래 목적지였던 부산이었다. 부산 납골당 무연고자실에 오랜 시간 보관돼 있었다는 것이다. 먼 길을 돌고돌아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름도 찾지 못한 채 잊혀진 희생자들의 사연은 안타까움을 더한다.
 
큰 참사를 겪은 사람들을 진짜 힘들게 하는 것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차가운 바다에서 귀향을 멈출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날을 증언하기 위해 수십년 동안 애써온 생존자들과, 그 외로운 시간들에 대하여 이제라도 세상의 공감이 필요한 순간이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꼬꼬무 우키시마호사건 1945년 해상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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