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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모살제, 계모와 아들은 왜 원수가 되어야 했나

[TV 리뷰] tvN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24.01.18 17:37최종업데이트24.01.18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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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다는 의미로, 역사상으로는 광해군과 인목대비(소성왕대비)의 악연을 상징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당연히 현대에서도 금기시되는 패륜 범죄이지만, 특히 효를 나라와 정치의 근본으로 강조하던 유교국가 조선에서 폐모살제란 왕조차도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천인공노할 사건이었다.

그래도 한때 가족이고 모자관계였던 두 사람은 어쩌다가 조선왕실 역사상 전후무후한 악연의 주인공이 되어야만 했던 것일까.
 
17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91회에서는 '광해군은 왜 어머니 인목대비에 의하여 폐위당했나' 편을 통해 권력다툼이 초래한 비극으로 서로를 파국으로 몰아넣은 철천치원수가 되어버린 두 인물의 이야기를 조명했다.
 
광해군은 1575년(선조 8년)에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 사이의 둘째 서자로 태어났다. 선조의 정비였던 중전 의인왕후는 슬하에 자녀를 낳지 못했고 생모가 일찍 죽어, 의인왕후가 광해군을 친자식처럼 키웠다고 한다. 서열상 광해군의 위로 동복형이자 선조의 장남인 임해군이 있었지만 그는 어릴 때부터 지나치게 포악한 성격으로 악평이 자자했고 선조의 눈밖에 나며 왕위를 넘보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후궁의 자식이지만 총명함과 재능을 인정받은 광해군은 선조의 유력한 후계자로 부상한다.
 
1592년 벌어진 임진왜란은 광해군에게는 위기이자 기회가 됐다. 선조는 그때까지 세자 책봉을 치일피일 미뤄왔으나, 전황이 다급해지자 신하들의 권유로 어쩔수없이 광해군을 임시로 세자에 앉혔다. 당시 선조는 조정을 둘로 나누어 광해군에게 분조(分朝)를 이끌게 했고, 본인은 혼자 명나라로 도주할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광해군이 의외로 뛰어난 역량을 선보이며 분조를 잘 이끌었고 전란속에서 민심을 훌륭하게 수습하는 데 성공했다. 자연히 광해군의 세자로서의 권위는 크게 높아졌다. 명나라 도피가 거부 당하고 이래저래 체면만 구기게 된 선조는, 이후 백성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전쟁 영웅이 된 아들에 대한 노골적인 시기와 질투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임진왜란을 전후로 선조와 광해군은 더이상 아버지와 아들 사이도, 1인자와 후계자도 아닌 사실상의 정적관계였다. 여기에 종전 2년 만인 1600년에 광해군의 후원자이던 의인왕후가 사망하며 왕실내 정치적 버팀목이 사라졌고, 명나라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계속해서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면서 광해군은 불안하고 외로운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1602년 인목왕후가 선조의 계비로 간택되어 입궁한다. 당시 선조의 나이는 51세, 인목왕후는 19세에 불과했다. 서열상 아들이 되는 광해군보다도 9살이나 어렸다. 광해군에게나 인목왕후에게나 서로가 여러모로 불편하고 난감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인목왕후는 선조와 결혼 이후 슬하에 1남 1녀를 얻었다. 장녀는 정명공주였고 차녀도 있었으나 사산했다. 1606년 인목왕후가 마침내 아들인 영창대군(永昌大君) 이의를 낳은 것은 왕실에 일대 회오리 바람을 불러오게 된다. 선조로서는 즉위 39년만에 정실에게서 얻은 최초의 적자이기도 했다.
 
선조는 영창대군을 얻은 데 크게 기뻐하며 왕실의 관례마저 깨고 막대한 재산을 하사하며 파격적인 대우를 아끼지 않았다. 영창대군이 태어나면서 조정의 판도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선조의 복심이 영창대군에 있음을 알게된 조정 신료들은 영의정 유영경을 비롯한 친영창대군파와 광해군파로 분열되었다.
 
사실상 정적이 된 광해군과 인목왕후의 사이도 점점 멀어졌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왕(광해군)이 동궁(세자)에 있을 때 자주 선조의 뜻을 잃자, 대비(인목왕후)이하 여러 후궁들이 동궁에게 불경한 경우가 많았다'고 기록되어있다. 선조의 총애를 등에 업은 인목왕후와 후궁들이 노골적으로 광해군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인목왕후는 적자를 낳았다는 자부심에 왕비로서의 권위가 높아졌을 것이고,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싶다는 욕심에 광해군을 견제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광해군으로서는 그동안 선조의 질시와 견제로 쌓였던 분노가 인목왕후에게로 향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장면이었다.
 
당시 왕실의 후계 경쟁은 양측 모두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갯속이었다. 선조가 광해군을 싫어했고 적자인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했던 정황은 분명했다. 영창대군이 세자로 책봉될 수 있는 나이(최소 약 7-10세)까지 선조가 건재한다면 세자 교체도 전혀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었다. 이를 알고 있는 광해군으로서는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반면 문제는 선조의 건강과, 세자교체의 명분 부재였다. 영창대군이 출생할 무렵 선조는 이미 55세로 당대로서는 상당한 고령이었다. 광해군은 비록 선조와 갈등을 빚고 있었지만 어쨌든 오랜 세자 경험과 임진왜란 시절의 활약을 바탕으로 이미 스스로 충분한 권위와 인망을 확보하고 있었다. 명분과 원칙을 강조하는 조선 사회에서 종법상 아무런 결격사유가 없는 세자를 왕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갈아치우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를 알고 있던 인목왕후로서도 이미 적자를 낳아버린 상황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을수 있는 길은, 선조가 살아있을 때 어떻게든 자신의 아들을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세자에 올리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나이 많은 아들과 어린 계모는 둘로 나눌 수 없는 왕위 자리를 놓고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운명이 선택한 승자는 광해군이었다. 1608년 2월 1일 57세의 선조가 병으로 쓰러져 운명한다. 대비가 된 인목대비의 나이는 25세, 영창대군은 아직 세 살에 불과했다. 34세의 광해군은 세자로서 선조의 뒤를 이어 조선 15대 국왕에 등극한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어린 영창대군을 잘 돌봐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는 선조가 광해군을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하는 것과 동시에, 훗날 영창대군이 불행한 정치 보복의 희생양이 될 것을 미리 직감한 듯한 내용이다. 인목대비 역시 선조 사후 유언을 광해군과 대신들에게 재빨리 공개한 것은, 사실상 영창대군의 모습을 보존해달라는 읍소의 의미였다. 하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세자인 자신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영창대군만 걱정하는 아버지의 유언은 광해군에게 또다른 상처가 되지 않았을까.
 
심지어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한시라도 빨리 보위에 올리라고 앞장서기까지 했다. 당시에는 선왕의 죽음에 대하여 애도기간을 가지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를 알고 있던 인목대비가 누구보다 광해군의 즉위를 서두른 데는, 왕위가 비어있는 상태에서 영창대군이 여전히 광해군의 경쟁자로 남아있다면 언제든 이를 명분으로 제거대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만큼 불안정한 정국 속에 인목대비가 느꼈을 두려움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1608년 2월 2일, 마침내 광해군이 즉위한다. 오랜 암투를 이겨내고 힘겹게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그간의 한을 풀듯 얼마 가지 않아 정적들을 향한 '피의 복수'를 시작한다. 영창대군파에 섰던 영의정 유영경이 사사되었고, 명나라의 세자 책봉 거부에 명분이 되었던 친형 임해군도 유배되었다가 의문사한다.
 
광해군의 다음 목표는 바로 이복동생 영창대군이었다. 광해군 5년인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가 발발하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외가인 연안 김씨 가문이 역모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된다. 이는 광해군이 영창대군과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평범한 강도사건을 역모로 조작한 사법살인이었다.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들은 모두 처형되었고 왕실의 외척인 김씨 가문은 풍지박산이 나고 만다. 여기에 인목대비는 궁중에서 궁녀들에게 사주하여 광해군이 친모처럼 존경하던 의인왕후를 저주하는 굿을 했다는 혐의로 적발되며 사면초가에 놓인다.
 
서인으로 강등된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당했다. 인목대비는 강하게 거부했으나 영창대군은 끝내 강제로 끌려나가며 모자는 생이별을 하게 된다. 광해군은 아버지 선조의 유언을 언급하면서 영창대군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인목대비를 달랬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유배된지 6개월 만인 1614년 2월, 9세의 영창대군은 유배지에서 증살(蒸殺), 방에 가두어 둔 상태에서 불을 때워 쪄서 죽이는 잔혹할 방법으로 살해당한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영창대군이 빨리 죽지 않을까 걱정하여 온돌에 불을 때서 뜨겁게 하여 태워죽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광해군은 임해군 때와 마찬가지로 장례를 잘 치러주라는 간략한 지시만 내린채 사건을 마무리했다. 아무 것도 할수없었던 인목대비는 아들의 죽음을 뒤늦게 전해듣고 목놓아 통곡했다.
 
이제 광해군의 마지막 목표는 영창대군의 친모이자 자신의 계모인 인목대비만이 남았다. 광해군은 처음에는 신하들의 페위 요청에 한동안 겉으로 난색을 표시하는척 했으나, 1618년 1월 28일 마침내 경운궁(오늘날의 덕수궁)에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명칭을 대비에서 서궁(西宮)으로 격하할 것을 지시했다. 오늘날의 가택연금이다.
 
엄연히 법적으로 의붓어머니이자 왕실의 어른을 유폐한 것은, 유교적 질서를 강조한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패륜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광해군의 대표적인 악행으로 불리우는 '폐모살제'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광해군이 세자 시절에 겪은 트라우마와 피해의식으로 선을 넘었다고 분석한다. 왕조 사회에서 권력자가 자신의 권위에 위협이 될수 있는 정적들을 숙청하는 것은 사실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경우, 지나치게 성급하고 잔혹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선조 사후 광해군의 권위는 탄탄한 편이었고 무리하게 사건을 조작하고 절차를 어겨가면서까지 정적들을 학살할 필요는 없었다. 설사 광해군의 왕권에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해도 늦어도 영창대군을 사사하는 선에서는 모든 숙청을 끝냈어야 했다. 사실상 모든 힘을 잃고 왕위를 직접 노릴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던 인목대비까지 폐위시킨 것은, 결국 광해군 자신을 '패륜아 임금'이라는 벗어날 수 없는 프레임에 영원히 가두며 본인의 몰락을 자초하는 자승자박이 되고 말았다.
 
폐위된 인목대비는 민우시(憫牛詩)를 지어 자신을 늙은 소로, 광해군을 채찍질하는 못된 주인에 빗대어 자신의 고단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민심은 불효자인 왕에게 친아들을 잃고 핍박당하는 인목대비를 동정했다.
 
1623년 3월 13일,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며 광해군의 치세는 하루아침에 종말을 고한다. 궁궐을 장악한 반정세력은 왕실의 어른인 인목대비를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고 능양군(훗날의 인조)를 왕위에 책봉하는 교지를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인목대비는 능양군과 반정세력에게 "이혼(광해군의 본명) 부자의 머리를 가져와서 내가 직접 살점을 씹은 뒤에야 책명을 내리겠다"고 요구했다고 한다. 인목대비의 광해군에게 쌓인 원한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심지어 인목대비는 자신이 직접 광해군을 국문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광해군은 반정군에게 사로잡혀 인목대비 앞으로 끌려와 무릎을 꿇었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죄목 36가지를 적어 꾸짖으며 폐위를 선언하는 것으로 복수했다. 왕위를 물려받은 능양군은 16대 국왕 인조가 되었고, 인목대비는 인조의 즉위와 동시에 왕대비의 지위를 회복한다.
 
오랜 한을 풀어낸 인목대비는 광해군 폐위 9년 만인 1632년 6월 28일, 49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당시 폐위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어있던 광해군은 죄인의 신분이었지만, 계모인 인목대비의 아들로서 예를 다해야했기에 상복을 전달받았다고 한다. 광해군은 평생의 원수였던 어린 계모의 사망 소식과 상복을 받으면서 어떤 심경이 들었을까. 아마 참으로 질기고도 독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광해군은 9살 어린 계모보다도 9년을 더 살았다. 1641년 7월, 광해군은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67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피는 섞이지 않았으나 어머니와 아들로 만났던 두 사람은 왕좌라는 권력을 놓고 다투게 되면서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었다. 그들이 살아가던 궁궐은 살아남기 위하여 서로를 죽여야만하는 또다른 전쟁터였다. 결국 그들은 가장 서로의 가장 소중했던 것을 뺏고 빼앗기면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벌거벗은한국사 인목대비 광해군 인조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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