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니TV 오리지널 <사랑한다고 말해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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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유행했던 "나로 살고 싶다. 나를 찾겠다"라는 말에 알레르기라도 있는 것 마냥 나는 그 말에 몹시 반감했다. 지인과 대화를 나누다 "나를 찾겠다는 말 너무 싫어"라고 하자 지인은 "왜요, 저는 간절한데"라고 했다. 그는 누구 엄마로 불리는 게 생각보다 기분 좋진 않다고 했다. 누구 엄마도 자신의 삶이라고 하자 그런 삶에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자신은 자신을 찾고 싶다고 했다.
"뭘 찾고 싶어요? 나를 찾는다고 하면?" 궁금해서 다시 물었다. 뭔가 엄청난 것이 나올 줄 기대하고 있었는데 답변은 의외로 소소했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거요 TV 보고 책 보고 자고 영화 보고 그런 거요." 내가 지루할 정도로 늘 하는 평범한 솔로의 삶이 누군가에겐 간절히 소망하는 자아 찾기의 일상이라니. 알 수 없었다.
나는 드라마 마니아다. 정확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들은 신조어를 유행시키는 데 일조한다. 작가들은 어떤 대사를 창조해 내는 것에 희열을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말의 유희를 담는 시와는 다른 언어지만 그 어떤 문장보다 일상을 깊숙이 파고든다. 그리고 많은 파생어를 낳는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같은 타이틀은 '엄마가 처음이라서'와 같은 명사를 바꿔가며 자신을 합리화하는 문장으로 자리 잡았다. <나의 해방일지>에 나온 대사 '추앙하다'는 사랑의 다른 뜻으로 읽혔다. MZ 세대의 '플러팅'이란 단어는 과거 '대시'라는 말의 현대어이다.
유행은 흐름이다. 트렌드라고도 한다. 살짝 웃겨야 잘 쓰는 글이고, 드라마도 적절한 코믹 요소가 있어야 시청률이 보장된다. 글이던 드라마던 지루해지는 순간 죽음이다. 그런 와중에 흐름에 역행하는듯한 아주 특별한 드라마 한 편을 보게 되었다. 신조어도 코믹요소도 없다. 새로움을 추구하려 강박증처럼 만들어내는 타임슬립도 판타지도 아니다. 멜로 필수인 눈물 펑펑 전매특허 신파장면도 없다. 자극적인 마라맛도 없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통할까 싶을 정도로 호흡이 아주 느리고 조용한 시골 향 같은 드라마인데 등장인물도 많지 않다. ENA 채널에서 방송되는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의 장르는 로맨스, 휴먼 드라마다. 시청률은 1%대(닐슨코리아 유료가구 플랫폼 기준). 시청률이 명작을 의미하는 건 아니지만 자본주의 역시 무시할 수 없으니 작품에 비해 아쉬운 성적임이 틀림없다.
처음 시작은 배우 정우성이었지만 정우성과 제법 잘 어울리는 선이 고운 배우 신현빈의 등장에 시선이 계속 머물러졌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조용한 로맨스에 빠져들었다. 줄거리는 청각장애인 화가 차진우(정우성)와 마음이 따뜻한, 배우 지망생 정모은(신현빈)이 서로에게 천천히 스며드는 이야기다. 영상도 예쁘지만 소리가 아닌 손으로 전달하는 고요함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처럼 맑고 아름답다.
"나는 당신과 단지 언어의 차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을 지켜줄 수 없을지도 몰라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9화에서 진우가 모은에게 손으로 말하는 대사다. 진우는 자신이 장애를 가졌음에도 모은이 여자라는 이유로 보호의 대상으로 본다. 남자도 사람이기에 보호받고 상처받는 존재다. 그렇기에 나는 여자 주인공 모은이 현실의 우리에게 들려줄 대사가 몹시 궁금하고 기대됐다.
"나를 지켜줄 필요는 없어요. 나는 그냥 당신을 사랑해서 옆에 있는 거니까." 모은이 그렇게 답하자 진우의 눈가는 촉촉해진다. 사실, 진우는 듣지 못해 첫사랑을 지켜주지 못한 과거의 아픈 트라우마가 있다. 그렇기에 더욱더 조심스러운 사랑의 시작이다. 그런 면에서 모은의 답은 진우의 무거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내려놓게 만든다. 모두의 응원처럼 두 사람은 이제 세상에 만들어진 커다란 나무 울타리를 차분히 넘어야 하는 일만 남았는지 모른다.
진우는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태호의 소리를 듣지 못해 외면한다. 태호는 그런 진우가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어른으로 오해한다. 설명하려는 모은을 뿌리치며 가는 태호의 행동에 진우는 오해하면 하는 대로 사는 삶이 편하다고 한다.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 소리 없는 세상에 쌓인 감정이 많아 보임을 짐작하게 하는 장면이다. 모은 은 진우가 좋은 사람임에도 오해 당하는 것이 싫어 태호가 흘린 분실물에 진우의 인터뷰가 담긴 팜플랫을 첨부해서 보낸다.
태호는 자신이 오해했음을 알고 진우가 가르치는 미술 수업이 듣고 싶어 센터로 찾아간다. 청각 장애 학생들은 청인인 태호가 왜 이곳에 들어왔는지 궁금해한다. 태호는 "말 많은 사람들이 싫다. 소리가 시끄러워서 이곳에 들어왔다. 이곳은 조용한 거 같아서"라고 답한다. 학생들끼리 수어로 말하는 내용을 알아듣지 못하는 태호는 이방인이다. 그럼에도 불안해 보이지 않는다. 친구들에게 학폭을 당하는 태호의 세상에서 취급당하는 이방인의 모습과는 달리 평온해 보인다.
그렇기에 진우가 그때의 외면을 사과했을 때 태호는 이런 말을 한다. 듣지 못해서 그런 거니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그러나 진우는 "두 눈이 나에게는 귀야. 네 표정에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모른 척한 거 맞아. 사과할게"라고. 태호는 "귀가 늘 열려있다고 다 좋은 건 아니에요 괴로울 때가 많거든요. 들리는 모든 순간이 다 좋진 않아요"라고 말한다. 진우는 "가끔은 못 듣는 것도 나쁜지 않아. 어떤 말은 듣지 못해서 생긴 상처보다 더 큰 흉터를 남기니까"라고 답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세상이 난도질하는 '소리'의 아픔이다.
진우는 듣지 못함으로써 말하지 못한다.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은 세상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듣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많겠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소리' 없는 고요함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들려주고 싶을 단 한 번의 소리 "사랑해"라는 말을 수천번 외치지만 고요한 독백으로 처절하게 남겨질 뿐이다.
우리가 쉽게 하는 '사랑해'라는 '소리'가 누군가에겐 간절한 소망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가볍게 던질 수만은 없는 단어일 텐데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고 수없이 말하면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는 것일까. 말로는 '사랑해' 하면서 때리고 가슴을 후벼 파는 사람들은 현실 속에서도 많이 등장한다.
진우는 말한다. "자신은 노력해야 하지만 세상에는 노력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모은은 말한다. "조금은 공평하지 못할지라도 그때까지 우리, 사랑해도 되지 않을까."
진우가 꿈꾸는 세상은 누군가에겐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다. 살면서 사랑에 상처받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사랑엔 수많은 이별이 존재한다. 그러니 모은의 말처럼 '그때까지' 사랑해도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말해줘. 모은 은 그 말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또 하고 싶은지도. 그러나 '사랑해'라는 말이 주는 무거움을 알기에 더디지만 차분하게 서로에게 닿아가는 중이다.
엄청난 것도 아닌 평범한 진우의 일상이 소중한 것은 당신이 절대 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소리가 아닌 마음으로 전달되는 담백한 대사는 그 어떤 현란한 말 보다 따뜻하다. 소리 없는 세상에 그림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진우의 마음처럼 사랑은 어쩌면 많은 말이 필요 없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의 시선으로 쫒는 소리는 이기적인 세상을 조금 더 너그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완벽한 재능에도 유난 떨지 않고 끊임없이 마음이 담긴 일을 찾는 배우 정우성은 그가 연기하는 진실한 진우와 닮아있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주는 이야기의 힘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다. 정우성은 그 여정을 진우와 함께 하고 싶어 제작하고 출연했는지 모른다. 평소 소신 있는 그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꿈꾸는 알레르기 없는 세상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이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달콤한 상상을 해본다. 어쩌면 정우성이었기에 가능한 디테일로. 나이 들수록 멋진 배우가 틀림없다. 요란함이 없는 진우처럼.
나는 지금 그가 띄우는 연서를 받고 있는 중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연서를 받게 되어 세상이 좀 더 따뜻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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