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붉은 장미의 추억>의 주역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배우 배우경, 위다은, 김지원, 김영민.
정재필
60여 년이 지나는 동안 필름이 사라지고 대본만 겨우 전해지던 영화가 새로운 옷을 입고 관객과 만나는 중이다. 노필 감독, 배우 신영균, 김지미가 주연을 맡았던 <붉은 장미의 추억>(1962)은 '낭독극'과 영화적 요소를 더한 결과물로 재탄생했다. 단 하루의 촬영, 배우들은 일인다역을 하거나 현장 일을 거들며 영화에 스며들었다.
살인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간 사내와 실종된 부친의 행방을 쫓는 여가수의 사랑 이야기. <붉은 장미의 추억>은 지금 분류로 치면 막장 드라마처럼 보인다. 하지만 생계를 위해 본인이 원하던 예술영화를 제쳐두고 통속극을 찍어야 했던 청년 노필 감독을 떠올려 보면 단순하게 치부할 작품은 아니다. 한국연극인복지재단, 중랑문화재단의 협업 프로젝트로 서른여덟이란 나이에 요절한 감독의 흔적을 발견하는 의의가 있다. 마침 영화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가 있던 5일 오후 서울 노원 더숲아트시네마에서 김영민, 김지원, 배우경, 위다은 등 네 명의 배우를 만날 수 있었다.
"예술가들 더는 상처받지 않길"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 중인 배우 김영민은 한국연극인복지재단 이사기도 하다. 그의 참여로 해당 프로젝트가 대외적 홍보에도 힘이 실리게 됐다는 평에 그는 "다 된 상에 숟가락 하나 얹었을 뿐"이라며 짐짓 민망해했다. 연극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오프리밋> 등으로 활동해 온 김지원은 극중 아나운서와 송정자 역할을 병행하며 무게감을 더했다. 배우경 또한 박 변호사와 이 지배인을 연기해 주인공들에게 시련 혹은 조력이 되었고, 위다은은 실제로 이번 영화 조연출을 의뢰받았다가, 극중 조연출 역할로 출연해 현실과 과거를 잇는 가교가 됐다. 일종의 극 속의 극 형식인 이번 작품에서 중요한 캐릭터였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제가 유령(장국영) 역할로 찬실이를 위로하는 존재였잖나. 이번 작품에선 노필 감독의 현신이었는데 어떤 마음으로 배우들과 현장을 바라보나 생각하며, 자연인 김영민 또한 흘러가는 시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김영민)
배우들은 공통으로 사라졌던 영화를 새롭게 재탄생시켰다는 데에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이를 두고 국내 1세대 영화 평론가 김종원은 영화계에 새 역사를 썼다고 평하기도 했다.
"제가 올해로 스물아홉인데 1960년대 영화를 볼 기회가 없기도 했고, 이번 작업이 아니었다면 영화 작업은 전혀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작품으로 난생처음 영화제 레드카펫도 밟아보게 됐다. 문삼화 연출님(본래 <붉은 장미의 추억> 낭독극 버전을 연출했다. 백재호 감독이 이를 영화화시킨 것, 기자 주)의 제안에 생소하기도 했는데 극장 객석에서 관객분들과 같이 영화를 보니 참 묘하더라.
이 영화를 할머니께 꼭 보여드리고 싶었다. 굉장히 솔직하신 분이라 제 공연이 재미없으면 표정이 안 좋으시다(웃음). 근데 이번엔 영화를 보시고 로비에 한참을 앉아 계시더라. '그 한복 입은 배우(김지원)가 잘하더라'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제겐 아주 소중한 표현이었다. 노원 복지회관에서 어르신들을 모신 대관 행사를 한다는데 실제로 당시 이 영화를 보신 분도 계실까 내심 기대도 하고 있다." (위다은)
이 작품 직전 배우경은 국립극단 시즌 단원 오디션에 떨어져 낙심하던 차였다. 그런데 당시 심사위원이 문삼화 연출이었고, 그에게 이번 작품 출연을 제안했다고 한다. "역시나 인생은 내 뜻대로 되진 않지만, 이렇게 위기가 기회가 되기도 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고 배우경이 말했다.
이는 원작 영화 감독인 노필의 생애와도 맞닿아 있다. 스물셋에 데뷔작 <안창남 비행사>를 내놓은 그는 생계가 어려워지자 사재를 털거나 돈을 빌려 가며 영화를 만들었다. 결국 빚더미에 올라 서른여덟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선택을 하고 만다. 그를 연기한 김영민은 영화 말미 대본에 없던 대사를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 내뱉는다. 좌충우돌하며 낭독 연기를 하는 배우들을 향해 '고맙소'라고 한 것.
"사실 이런 이야기는 꺼내기 조심스러운데, 예술인들이 창작하면서 마음을 다치는 경험을 다들 하잖나. 예술을 하기 때문에 겪는 문제들이 있다. 시스템 문제일 수도 있고. 뭐가 됐든 자기 인생을 바쳐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더는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작품으로 60년 전을 추억하는 게 노필 감독님 입장에서 고마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김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