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인"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사 진진
영화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가운데 일어나곤 하는 소소한 사건을 다룬다. 하지만 사건 자체가 이야기의 중심은 아니다. 무엇보다 <괴인>의 결정적 요소는 '기홍'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의 존재감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존재감의 소유자들은 아니다. 좀 유별나긴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종종 마주칠 법한 이들을 형상화한 정도에 불과하다. 주인공이라 할 기홍은 좀 비호감에다 사회성이 부족해 보이지만 큰 문제는 없는 인물이다.
그의 주변 인물들도 내 가족이거나 살면서 밀접하게 엮일 관계가 아니라면 그저 이웃 혹은 지인으로 스쳐 지나가는데 별 문제 없을 유형이다. 하지만 그런 캐릭터들을 조합해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연속으로 장편영화, 그것도 136분을 끌어간다? 이건 모험에 가까운 도전이 되기에 충분한 위험수다. 그리고 범상치 않은 제목처럼 이 영화는 투자자라면 뒷목 잡고 쓰러지기 직전이 될 만큼 아찔하게 그런 모험에 과감히 달려든다.
물론 대책 없이 뛰어든 건 아니다. 감독과 제작진은 확신을 갖고 도전했을 게 분명하다. 그 확신의 발로가 이 영화를 목격한 이들에게는 기이한, 또는 경이로운 영화적 체험으로 인도하는 길잡이 혹은 호롱불 역할을 톡톡히 도맡아준다. 대체 이 영화의 '괴력'은 무엇이기에?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이 기이한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적지 않은 이들이 고심해 예시 혹은 '레퍼런스'를 호출할 테지만, 필자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물론 정독에는 실패했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가 수행한 과업이 가장 먼저 떠올랐었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서구 대중문화에서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가진 위상과 상징을 조각조각 해체한 뒤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의 일상으로 재구성해낸 것의 의미와 <괴인>이 펼쳐 보이려 한 풍경의 의도가 '통'하는 게 아닐까 하는 몽상에 가까운 것은 맞는 듯하다.
지금으로부터 근 100년 전, 1922년에 조이스가 1904년 6월 16일, 훗날 아일랜드의 수도가 된 당시 대영제국 령 더블린의 평범한 중년남자 레오폴드 블룸의 하루는 21세기 초반 한국에서 주인공 기홍의 며칠로 각색된 것처럼 다가온다. 기홍은 <율리시즈> 서사시의 주인공 오디세우스보다는 오히려 그를 초반에 괴롭혔던 거인 폴리페모스의 영락한 후예처럼 보인다. 그런 차원에서 이미지 적용 측면으로 보면 역시 <오디세이아>를 20세기 중반 미국 남부로 옮겨 재구성한 코엔 형제의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 (2000)의 연출과도 비교해볼 만하다(그 영화에선 존 굿맨이 주인공 일행을 가로막는 현대의 폴리페모스 거인을 연기한 바 있다).
코엔 형제의 영화가 판타지를 가미한 코미디 형태로 <오디세이아>를 각색했다면, <괴인>은 근현대 '모더니즘' 사조의 한 상징이기도 한 제임스 조이스의 방식으로 변용했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까 정도의 갈래로 구별된다. 서양문화에서 대표적인 고전 반열에 속하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재해석하는 건 그저 설정 차용으로 그칠 문제가 아니다. 상당한 각오와 원작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는 과제다. 그만큼 자신감과 파격이 필요한 숙제다. 그래서 <괴인>의 도전이 혹여나 조이스와 닿아 있다면 그만큼 그 영화를 만든 이들의 도전이 비범한 시도라는 증명이기도 할 테다.
10년간 진행된 오디세우스의 방랑을 조이스는 단 하루 동안 풀어내버린다. 하지만 원작의 주요 캐릭터들이 빠짐없이 등장하고 주인공의 여정 역시 기본 구조를 파괴하지 않는다. 다만 배경만 바뀌고 접근방식만 다를 법이다. 상상하긴 쉽지만 구현하기는 보통 어려운 게 아닌 도전방식이다. 물론 <괴인>이 난이도로 악명 높은 조이스의 소설을 배경만 한국으로 옮긴 형태는 아니다. <괴인>의 경우엔 좀 더 '기홍'이라는 현대 판 폴리페모스가 주인공이 된 '외전' 형태에 가까워 보이는 접근이다. 이 영락한 폴리페모스가 2020년대 한국에서 애환을 겪으며 살던 중 며칠간 벌어지는 그의 모험담을 풀어내려는 시도라 하겠다.
관객의 속물적 기대치를 사뿐히 '즈려밟는' 괴력의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