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 EO"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찬란
폴란드 어느 시골을 순회하며 서커스 공연에 동원되던 당나귀 EO는 학대도 꽤나 당하지만 그와 공연을 펼치는 인간 파트너 '카산드라'에겐 지극한 애정을 받는 존재다. (현실에서나 영화 속에서나) 기본적으로 당나귀는 인간의 언어로 입장을 전할 수 없기에, 관객은 그저 그의 눈빛과 동작으로 EO의 심경을 추측할 뿐이다. 이런 핸디캡을 안고 있지만 관객의 눈 앞에 비친 EO의 표정을 유추해보자면 고달파도 그런대로 견디면서 큰 불만은 없는 시간을 보내는 듯 보인다. 하지만 서커스단이 동물을 학대한다는 동물보호단체의 시위와 청원 때문에 지방자치단체가 공권력을 동원해 어느 날 갑자기 서커스단의 동물들을 몰수한다. EO는 파트너와 생이별을 당하고 같은 처지의 동물들과 함께 보호시설로 옮겨진다.
겉으로 보면 EO는 다른 서커스단 동물들처럼 구조된 형국이다. 하지만 인간 위주의 잣대로 학대당하는 동물들을 구출했다는 기쁨에 겨웠던 이들은 곧 각자의 길을 가고 잔뜩 남겨진 다양한 동물들은 곧 처치곤란 대상이 되고야 만다. 관공서와 유지들은 동물이 아니라 자신들이 중심이 되어 공치사와 기념식을 치른 뒤 뿔뿔이 흩어지고 동물들은 낯선 인간들에게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다. 인간들 역시 구조는 했다지만 개별 동물들을 섬세하게 돌보거나 특성을 고려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EO는 당나귀이기에 비슷한 종으로 분류된 몰수된 말들과 함께 수용된다. 과거 유럽을 호령하던 폴란드 창기병, '윙드 후사르'를 태우고 전장을 누비던 말들의 후예일지도 모를 (즉, 폴란드의 국가 정체성과 연결되어 우대받을 조건을 다 갖춘) 훤칠하고 잘생긴 말들은 시설에서 (과연 그들이 원하는 게 이런 대우인지는 모호하지만) 관심과 함께 제법 대접을 받으며 지낸다. 하지만 볼품없는 당나귀에 불과한 EO는 (서커스단에서처럼) 찬밥 취급을 당한다. 외모가 빼어난 말이 사육사들에 의해 단장되고 있을 때 EO는 건초가 가득한 짐수레를 끌며 고된 노동에 시달린다. 결국 한 성깔 하기로 유명한 당나귀의 천성이 발현된 탓인지 양순한 편이던 평소 모습과 달리 EO는 반은 고의로 사고를 거하게 치고 그만 쫓겨나고 만다.
그는 당나귀 농장으로 옮겨지지만 며칠 새 급격히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식음을 전폐하며 농가의 근심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농장주는 그를 장애아동들의 체험학습장으로 보낸다. 겨우 며칠간 시간을 보내며 그곳에서 그럭저럭 적응하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EO의 생일을 기억하던 파트너가 밤중에 찾아와 평소에 그가 좋아하던 당근 머핀을 전하고 이별을 고하며 떠나가자 그리운 나머지 EO는 담장을 허물고 탈출하고 만다. 그러나 파트너 '카산드라'는 이미 멀리 떠나버린 뒤다.
EO가 목격하는 인간의 넘쳐나는 폭력과 악덕
이제 EO는 홀로 거대한 숲 속에 남겨진다. 하지만 야생당나귀의 후손임에도 인간에게 사육되며 대를 이어온 길들여진 동물이 된 지 오래다. 야생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인 EO에겐 어두운 숲 속은 자유로운 공간이 결코 아니다. 그저 낯선 공포의 대상일 뿐이다. 처음 보는 야생동물들은 숲의 이웃이 아니라 위험천만한 존재일 뿐이다. EO는 겁에 질린 눈빛으로 자연의 경쟁자들을 피해 발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위험은 그걸로 그치지 않는다.
인간 사냥꾼들은 과학기술의 정수인 레이저 포인터와 야간 투시경을 활용해 숲속 여기저기를 조준하며 어둠이라는 보호막도 걷어버리고 살육에 매진한다. 그 학살의 현장에서 죽임당하는 다른 동물을 구할 능력은커녕, 죽음을 애도할 틈도 없이 간신히 몸을 피한 EO는 다시 자신에게 익숙한 인간들의 마을로 향한다. 그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곳에서 엉겁결에 축구 훌리건들의 난동에 휘말린 EO는 아무 영문도 모르는 상태로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된다. 시합에 진 후 분노가 폭발해 상대팀을 습격한 패전 팀의 폭력 난동 와중에 앙갚음의 희생양이 되고만 것이다. 인간들의 무자비한 보복에 EO는 빈사 상태로 몰린다. 그가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은 건 당나귀의 울음소리 때문에 페널티킥 기회를 놓쳤다는 엉뚱한 분풀이 대상으로 지목된 탓이다. 안락사를 권하는 시설 관계자들에게 수의사가 자기 본분은 일단 살리는 거라며 헌신해준 덕분에 장기간의 치료를 거쳐 겨우 살아난다.
하지만 볼품없는 당나귀에게 주어지는 처우는 여전히 형편없다. EO는 또다시 짐수레를 끌고 모피농장에서 일하게 된다. 하지만 그곳은 그에겐 생지옥에 다름 아니다. 매일 모피를 얻기 위해 죽어나가는 철창 속 여우와 담비들의 눈빛을 겪어야 했던 그는 또다시 폭주해 대형 사고를 치고야 만다. EO의 분노는 정당한 응징의 형태로 볼 수 있지만 정작 그가 꾀했던 구조는 불가능하다. EO는 철저히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사육농장의 빈틈을 노린 말 도둑들이 침입해 그를 납치한다. 당나귀도 말 종류 아니냐는 도둑들의 갑론을박 끝에 대충 말 비슷하겠지 하는 무지의 승리로 EO도 트럭에 실려 먼 길을 떠난다. 그런데 그들의 말 도둑 목적은 고가로 팔리는 당나귀 살라미(염장 소시지) 도축용도다. 그런 전후사정은 까맣게 모른 채 EO는 폴란드에서 독일을 지나 소시지 생산 공장이 있는 이탈리아로 기나긴 여정을 이어간다. 중간에서 EO로선 도무지 이해 불가능한 인간 내의 암투가 속속 이어진다. 우연히 그를 보호해주려는 백작부인과 의붓아들을 만나지만, 그들의 기행에 적응하지 못한 EO는 또다시 자신의 의지로 그곳을 벗어난다. 하지만 그가 딱히 발걸음을 옮길 곳은 더 이상 없다. 기다려주는 이도, 돌아갈 곳도 없는 EO는 그만의 순례를 이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여정의 끝에서 종막이 찾아온다.
반세기를 넘어 겹쳐지는 두 당나귀 현자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