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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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과 목표는 같았지만 수단이 달랐던 인물이 바로 맬컴 엑스(1925-1965)다. 그는 비폭력을강조한 킹과는 정반대로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며 "양치기인 목사는 백인에게서 달아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러고 동시에 백인들과 맞서지말라고 가르친다. 그는 여러분과 저를 배신한 '반역자'다. 그에게 우리의 생명을 맡기지 말라"고 백인만이 아니라 킹까지 강하게 비난했다.
맬컴은 어렸을때부터 백인우월주자들의 차별과 위협에 시달리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했다. 6살 때 백인우월주의자들과 맞서던 맬컴의 아버지가 의문의 사고사를 당하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지내야했다. 방황하던 맬컴는 친구들과 강도짓을 하다가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맬컴은 수감생활중 과격 종교단체인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가입하며 본격적으로 흑백 투쟁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그의 본명은 맬컴 리틀이었으나 백인 악마가 붙여준 성이라며 엑스로 개명하고 백인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아프리카 흑인의 정체성을 잊지않고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맬컴은 "기독교는 백인들의 종교"라며 배척하며 흑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새로운 종교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맬컴은 1952년 가석방 이후 뉴욕 빈민가인 할렘가를 중심으로 흑인우월주의를 전파하며 "흑인의 삶이 비참해진 이유는 백인 때문"이라고 주장하여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훗날 '전설의 복서'가 되는 헤비급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본명 캐시어스 클레이) 역시 맬컴의 연설에 감동받아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가입하고 이슬람식 이름인 알리로 개명한 일화도 유명하다. 맬컴과 알리는 절친이 되었고 이들의 활약상은 '흑인은 백인에 비하여 열등한 존재가 아니다'는 것을 알리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킹과 맬컴은 폭력 사용에 대하여 극명하게 상반된 입장을 보였다. 킹은 여러 차례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테러에 시달리면서도 비폭력을 강조하며 "우리는 백인 형제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소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킹은 맬컴에 대하여 "그가 폭력에 대한 말을 줄이기 바란다. 폭력이 우리의 문제를 해소해줄 수 없다. 맬컴은 우리에게 크나큰 피해를 입혔다고 생각한다. 그가 했던 것처럼 흑인들에게 무장을 하고 폭력을 사용하라고 부추기는 것은 비탄을 초래할 뿐"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킹은 존 F 케네디 대통령과도 각별한 사이로 알려졌다. 킹은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백인 정치인들의 협력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진보적이었던 케네디는 킹을 통하여 흑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반면 맬컴은 흑인과 백인의 공존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흑인이 백인들에게 맞설 수 있는 힘을 기르는게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킹은 1963년 8월 28일 흑인 차별에 반대하는 평화시위였던 '워싱턴 행진'을 통하여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today)라는 명연설을 남겼다. 그는 '언젠가는 내 어린 자식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그들의 인격의 내용으로 판단받는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호소하며 모든 인간은 인종과 출신의 차별없이 모두 평등하게 대우받으며 공존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파했다.
당시 평화행진에는 흑인과 백인을 망라하여 무려25만 명이 참여하며 뜨거운 호응을 일으켰다. 킹의 명연설은 후대까지도 그의 사상과 인생을 함축하는 내용으로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하지만 맬컴은 워싱턴 행진에 대하여 "백인 광대와 흑인 광대가 함께 출연하는 소풍이자 서커스"라며 폄하했다. 또한 맬컴은 킹의 연설에서 강조된 'Dream'이라는 단어를 겨냥하여 "나는 미국이라는 체제에서 희생자의 눈으로 미국을 바라본다. 그 어떤 아메리칸 드림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오직 미국의 악몽(Nightmare)을 봤다"며 조롱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흑인들은 그저 비관적인 시선과 호전성만 가득한 맬컴보다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강조한 킹의 메시지에 더 공감했다. 1964년 12월 10일 킹은 흑인 인권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35세라는 당시 최연소 나이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두 지도자의 '비극적' 운명
하지만 흑인 인권을 위하여 다른 방식으로 함께 싸웠던 두 지도자에게는 똑같이 비극적인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1963년 흑인인권에 우호적이었던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비극이 발생하자 맬컴은 "당연한 일이기에 슬프지도 않고 기쁘기만 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로 인하여 네이션 오브 이슬람과 갈등을 빚던 맬컴은 결국 교단을 탈퇴했다.
이후 맬컴은 사우디 메카로 성지순례를 떠났다가 인종에 상관없이 친절한 무슬림 교도들의 모습을 보고 공존하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심경의 변화를 느꼈다고 한다. 맬컴은 미국으로 돌아온 이후에 인종차별 반대운동을 계속했지만 한결 온건한 노선으로 변화했다.
하지만 맬컴의 영향에 따라 폭력운동을 주장해왔던 네이션 오브 이슬람은 맬컴을 '배신자'로 규정했다. 1965년 뉴욕 할렘지역으로 연설을 하러왔던 맬컴은 네이션 오브 이슬람 단원의 총격을 받고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다. 맬컴의 나이 불과 39세였다. 평생을 흑인 인권을 위하여 투쟁했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한때 같은 편이었던 사람의 손에 의하여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맬컴이 세상을 떠나고 3년 뒤에는 킹마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킹은 맬컴 사후에도 흑인 참정권을 위한 운동과 여러 대규모 평화시위 등을 주도하며 백인 세력의 끊임없는 테러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심지어 킹을 협박한 대상에는 미국 연방수사국인 FBI도 포함되어 있었다. FBI는 워싱턴행진에서 20만이 넘는 시민을 결집시킨 킹의 영향력을 경계했고, 냉전시대에 민간인에 대한 불법사찰을 일삼았던 FBI는 킹의 사생활을 도감청하여 횡령과 성추문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된 자료는 기밀문서 기한이 해제되는 2027년이 되면 공개될 예정이다.
킹은 자신을 향한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더 큰 목표에만 집중했다. 1968년 4월 3일 킹은 흑인 노동자를 위한 연설에 초청받아 테네시주 멤피스에 방문했다가 숙소에서 백인우월주의자의 총격에 사망한다. 운명의 장난처럼, 당시 킹의 나이는 맬컴이 사망했을 무렵과 같은 39세였다. 미국 연방정부는 킹이 태어난 1월 15일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하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
"어둠을 어둠으로 몰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직 빛으로만 할수 있습니다. 증오로 증오를 몰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킹이 남긴 어록은 지금도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킹과 맬컴은 비록 가는 길은 달랐지만 지향했던 바는 같았다. 그들 두 사람은 모두 유색인종들이 차별받지 않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그들의 치열했던 투쟁이 남긴 메시지와 교훈은, 오늘날 미국 사회만이 아니라 다인종-다민족이 공존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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