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래퍼"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그린나래미디어㈜
그런 속사정이 재미있게도 조지의 집 또 다른 식구 격인 거미들의 내레이션 대화로 설명된다. 거미들에게서 '마거릿'이란 이름이 언급될 때 쉽게 마거릿 대처 전 총리를 떠올리게 만든다. 곧이어 '전등갓과 노조를 박살내자!'할 때는 대처 총리가 영국병을 치료한다며 임기 내내 대대적으로 벌였던 반(反)노조 정책이 겹쳐진다. 실제로 현재 영국 대도시 근교에서 복지수당에 의지하는 집단주거단지 거주민들 상당수는 대처의 노동개혁(?)정책으로 제조업 기반이 붕괴되면서 세대를 거듭해 실업자로 누적된 과거의 산업역군 노동자계급의 후예들이다. 그들은 패션 테러리스트로 불리는 '차브'의 하위문화를 형성하거나, 권태로운 일상을 떨치기 위해 폭음을 일삼고 '훌리건'으로 활약(?!)하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어낸다. 그런 기행을 벌이는 이들의 명성에는 생성과정이 엄연히 존재했던 것이다.
그 깨달음의 순간, 평범하고 훈훈하게만 보이던 부녀의 코미디 가미된 드라마는 <빌리 엘리어트>와 <풀 몬티>, 그리고 켄 로치의 영화들을 줄줄이 소환하며 사회적 리얼리티를 상기하게 만들어버린다. 특히 켄 로치의 작품 중 부양의무와 주거환경 부실 탓에 양육권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엄마의 고군분투를 다룬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와 <스크래퍼>는 거울의 대칭처럼 보일 정도다. <빌리 엘리어트>에서는 1970-1980년대 들어 영국의 산업혁명을 이끈 일등공신이던 탄광지대가 폐광을 맞이하게 된다. 정부의 강경한 산업구조조정 정책은 타협을 고려하지 않고 공권력을 투입해 강행된다. 패배가 예정된 파업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빌리의 가족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하던 상상이 <스크래퍼>에서 배경으로 각인되는 셈이다. 그렇게 거의 반세기를 경유한 영국사회의 파괴적 변천이 <스크래퍼>를 통해 일상풍경으로 드러나는 식으로 묘사된다. 여기에서 또 다른 켄 로치의 영화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와도 <스크래퍼>는 만나는 지점을 가진다.
'키친싱크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영국 특유의 사실주의 장르 문법의 영향은 전혀 상관없게 보이던 본 작품에도 의외 없이 중력을 뻗고 있었다. 물론 한없이 세밀화처럼 치닫지는 않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빌리 엘리어트>나 <풀 몬티>처럼 디킨스 이후 영국 대중문학과 영화의 뿌리 깊은 전통, 적절한 유머감각이 도드라져 보인다. 하지만 그런 코미디 장치는 결국 리얼리티의 강조가 자칫 과도한 회의주의로 빠져들지 않도록 배치한 기능적 경향성에 가깝다. 조지의 집 안 소품과 도구들, 생업(?)을 위해 그가 가방에 챙겨 넣는 온갖 연장들의 세심한 배치, 웃음을 유발하지만 지역사회를 상징하는 주변 캐릭터들의 인종구성, 부녀간의 갈등 축이 된 정체되고 비전 없는 동네의 사정들이 골고루 이어져 하나의 풍경화를 형상화한다.
그렇게 자신이 나고 자란 공간에 대한 숙지와 치밀한 구성의 조합이 어우러진 결과물로서 <스크래퍼>를 소화한다면, 그저 행간으로 스쳐 지나치기 쉬운 수많은 코드의 조합을 통해 극중 주인공들의 변화가 더 값지고 보람되게 여겨질 테다. 물론 무엇보다 이 영화는 20세기의 유산인 '정상가족'이 해체된 자리에 소멸이 아니라 대안적인 가족형태와 문화를 상상하는 단초의 특징이 가장 짙게 묻어나는 작업이다. 조지와 제이슨, 서로 잡아먹을 것처럼 굴지만 '티키타카' 수준이 대단한 부녀의 수평적이고 친구 같은 혈연 공동체가 마침내 탄생하는 과정을 관객은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억지 해피엔딩이라는 판타지로 도피하지는 않는다. 제이슨은 여전히 변변한 일자리도 없고, 조지는 학업에 별다른 소질이 없어 보인다. 그렇게 한심한 면을 서로 꼭 닮은 그들의 미래가 딱히 확 좋아질 것 같진 않다. 하지만 (현실에서 오히려 지극히 드물게 마련인) 장밋빛 기대와는 이 영화의 결말이 한참 거리가 멀지언정 부녀가 함께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갈 힘과 의지를 포기하지 않도록 (원래 가족의 근본 역할인) '방파제'이자 '울타리' 몫을 서로 전하는 데에는 부족하지 않은 결말이다. 그렇게 사실주의에 굳게 두 발을 딛고 꿈을 잃지 않을 만큼의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스크래퍼>의 84분은 고달픈 일상을 살아가는 2020년대 한국의 관객에게 위로와 희망을 동시에 선사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작품정보>
스크래퍼 Scrapper
2023|영국|코미디/드라마
2023.09.27. 개봉|84분|12세 관람가
감독/각본 샬롯 리건
주연 롤라 캠벨(조지 역), 해리스 디킨슨(제이슨 역)
출연 알린 우준(알리 역), 로라 에이크먼, 앰브린 라지아, 올리비아 브래디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
공동제공/공동배급 ㈜스튜디오 산타클로스엔터테인먼트
공동제공 ㈜키노라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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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