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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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와 헤어진 후 62세의 피카소는 이번엔 40살 연하의 법대생이었던 지적인 화가 질로를 만난다. 피카소는 아직 도라와 사귀고 있을 당시 옆 테이블에 앉았던 질로에게 체리를 선물하며 처음 데이트 신청을 했다. 질로는 "아버지나 다른 남자들과는 말이 안 통하는데 나보다 3배나 연상인 당신과 대화가 통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질로와 만나면서 피카소의 화풍도 또다시 변했다. 1946년 발표한 <여인, 꽃>에서는 녹색 잎사귀와 조명 등으로 표현한 머리를 통하여 지적이고 우안한 질로의 매력을 묘사하고 있다. 피카소는 질로에게 애정을 쏟았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얻었다. 이전의 연인들과 달리 피카소는 질로를 여왕처럼 모시며 지극정성을 다하는 것처럼 보였다.
올가는 질로를 질투하여 몇 년간 스토킹을 하며 괴롭혔다고 한다. 하지만 피카소는 그런 질로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았다. 그 무렵 피카소는 또다른 바람을 피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제서야 자신도 피카소에게는 스쳐지나가는 여자 중 하나였음을 깨달은 질로는 "그가 사랑한 건 여자가 아니라 미술뿐"이라고 일갈하며 역대 뮤즈 중 처음으로 피카소에게 먼저 이별을 통보한다. 피카소는 협박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질로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하여 집착했다. 하지만 질로는 "나는 내 사랑의 노예이지, 당신의 노예가 아니야"라고 일침을 날리며 두 아이를 데리고 피카소를 떠나버렸다.
피카소는 찌질하게도 결별 후에도 미술계에서 자신의 명성을 이용하여 질로의 화가 인생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질로는 굴하지 않고 유럽을 떠나 미국에서 화가의 길을 이어갔다.
질로는 피카소와 헤어진 지 11년 후 회고록(<피카소와 함께한 삶>, 1964)을 출간하며 그의 문란한 사생활과 비열한 면모를 폭로하는 것으로 복수했다. 회고록은 피카소만이 아니라 파리 예술계의 어두운 이면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17개국 언어로 출판될 만큼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 회고록에 따르면 피카소는 질로에게 "나는 악마이기 때문에 당신을 내 노예로 만들고 낙인을 찍을 것"이라고 협박했다고 한다.
피카소는 출판을 막기 위하여 소송을 벌였고 법정에게 질로를 맹공격했으나 결국 패소했다. 화가 난 피카소는 질로와의 사이에서 얻은 두 아이와의 관계도 단절했다. 하지만 질로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하여 부자가 되었고 새로운 사랑을 만나 재혼에 성공했다. 또한 피카소 사후를 대비하여 사생아가 된 자녀들을 다시 호적에 올리는 소송을 벌이며 피카소에게 복수했다.
올가와 질로에게 연이어 시달리며 스트레스를 받던 피카소는 72세의 노년이 되어 마지막 뮤즈인 자클린 로크를 만난다. 도자기 공장에서 만난 26세의 자클린은 피카소와는 46세 차이였고 딸을 가진 이혼녀였다. 피카소는 6개월간 자클린에게 장미를 선물하며 적극적으로 구애했고, 자클린의 딸을 양녀로 입적하기도 했다. 정신질환을 앓던 조강지처 올가와 사별하게 되면서 자유의 몸이 된 피카소는 1961년 3월 자클린과 결혼했다.
자클린은 피카소를 "나의 태양, 나의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정성을 다해 보살폈다고 한다. 말년의 피카소에게 자클린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그녀는 <터키 의상을 입은 자클린> <개를 안고 있는 여자> 등 피카소의 뮤즈 중에서도 가장 많은 400여 점에 이르는 작품의 주인공이 되었다. 피카소는 입체주의, 신고전주의, 초현실주의 등 자신의 예술세계를 총망라하여 다양하게 자클린을 표현했다. 자클린의 존재로 안정감을 되찾은 피카소는 노년까지도 활발한 작품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피카소는 1973년 4월 프랑스 무쟁의 별장에서 91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비록 사생활과 인성 면에서는 논란이 많았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천재예술가의 사망에 전 세계가 애도를 보냈다. 피카소가 남긴 재산은 약 5억 프랑(약 1조 4000억 원)에 이르렀다. 피카소가 생전에 유산 상속에 대한 유서를 남기지 않아 법적 공방이 예고되었지만, 아내 자클린이 유산을 공정하게 배분하며 논란의 소지를 차단했다.
하지만 피카소의 여인들 중 자클린과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 사후 오랫동안 떠나간 그를 그리워하다가 안타깝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피카소와 만난 여인들은 그로 인하여 정신질환에 걸리거나, 버림받는 등 대부분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피카소와 결별한 후에도 스스로 자립하여 행복한 삶을 되찾은 것은 프랑수아즈 질로가 유일하다.
"창조의 모든 행위는 파괴에서 시작된다." 피카소가 남긴 예술관은 그의 파란만장했던 사생활을 알고나면 뭔가 미묘하게 다가온다. 피카소는 흔히 천재 예술가로만 기억되지만, 그가 예술혼을 불태우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하는 데 7명이나 되는 뮤즈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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