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꽃의 전설"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사 진진
'전설'이란 단어는 속물화된 'LEGEND'에 그치지 않는다. 리처드 매드슨의 소설 <나는 전설이다>는 역설적인 '전설'에 대해 정의한다. 세상 모든 인류가 죽거나 돌연변이가 된 상태에서 오직 유일하게 자신만 구시대의 인간으로 남았다면 정상성의 기준은 무엇이고 자신은 어떤 존재로 남게 될까에 대한 존재론적 회의가 좀비 공포장르의 효시라는 타이틀과 함께 해당 작품의 돋보이는 매력으로 작용한다. 소설에서 주인공이 자신이 '전설'이 되었음을 깨닫는 순간에 느끼는 전율이 오히려 더 '전설'의 본질적 의미에 적합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해녀 역시 어쩌면 후자에 더 부합되는 존재들일 테다.
해녀라는 집단의 출발은 후대에 덧붙여진 낭만적인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제주는 봉건왕조 시절 온갖 특산품 공납 부역 때문에 시달리던 장소였다. 귤은 워낙 귀해서 일일이 나무마다 달린 숫자를 세어가며 통제했고, 부역에 지친 이들이 귤나무를 베려다 처벌을 당하는 사례가 허다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납에서도 가장 착취가 극심했던 건 섬이라는 특성상 풍부한 해산물이었다. '포작선'이라 불리는 작은 거룻배에 속박된 장정들은 수군 군선의 격군이자 온갖 해물 채취에 동원되었다. 수군이 '천역'이라 불리며 회피대상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계층이던 셈이다.
이들이 온갖 수단을 사용해 천역에서 탈출하거나 숫제 야반도주하는 등 '포작인'이 남아나지 않자 수령들은 꼼수를 써 여인들이 부역을 전담하도록 한 게 해녀의 출발인 것이다. 그렇게 제주 전역엔 전성기 기준 2만 명의 해녀가 활동했다고 전한다. 그들은 열심히 일해 가족을 먹여 살리고 그들만의 문화를 형성했다. 생사를 오가며 일하던 해녀들의 노동요는 '이어도 사나'였다. 노동요 치고는 흥겨움과는 아득히 거리가 먼 생과 사의 갈림길 묘사다. 그만큼 피할 수 없는 고된 노동의 곁에 항상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해녀들 사이의 엄중한 위계와 협동의 강조는 자신들 외에는 구조 받을 수단이 없기에 필연적이었다. 근대 이후 잠수복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거의 나체로 겨울에도 바다에 뛰어들던 작업방식은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개탄과 함께 허례허식을 초월하는 여성들만의 공동체문화로 양면성을 띄게 된다. '인어'의 전설은 적어도 동북아시아에선 듀공이나 매너티 같은 해양포유류가 아니라 해녀들의 목격담에서 비롯되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 해녀들의 여성공동체 문화는 이제 그 수명을 다 하고 서서히 사라져가는 중이다. 영화는 굳이 그런 쇠락에 대한 울분이나 항의를 소리 높여 웅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화면 속에서 내내 등장하는 초고령 해녀들만 봐도 쇠퇴에 대한 애잔한 정서는 감출 수 없다. 영화는 굳이 해녀의 역사와 기원에 대해 서술하진 않지만 관객은 자연스럽게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낭만적 대상이 아닌 지난한 삶을 품은 존재로 해녀를 재 정의하게 될 테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에선 유독 남정네들 보기가 힘들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천형 같은 고단한 물질을 요즘 식 표현이라면 '분유 값이라도 벌기 위해' 나섰던 강인한 여인들의 연대기이기 에 자연스런 귀결일 테다. 그리고 그렇게 전설이 된 직업군과 문화가 해양오염 때문에 소멸해가는 위험을 목도하게 만드는 결말부는 이 영화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오염수 논란을 상기하게 만든다. '전설'을 끝장내는 건 현세의 탐욕이다. 그런 직무유기와 환경파괴를 막지 못한다면, 유래를 찾기 힘든 자생적인 지역/여성/노동문화의 진혼곡처럼 <물꽃의 전설>은 슬픈 전설로 끝날지도 모른다.
<작품정보>
물꽃의 전설 Legend of the Waterflowers
2022|한국|휴먼 다큐멘터리
2023.08.30. 개봉|92분|전체관람가
감독 고희영
출연 현순직, 채지애
촬영/사진 김형선
수중촬영 김원국
드론촬영 김주완, 고대로
음악 예민
기획/제작 영화사 숨비
배급/투자 ㈜영화사 진진
2022 27회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2023 20회 서울국제환경영화제 한국경쟁
2023 33회 유바리국제판타스틱영화제 공식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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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