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스토리
3년의 시간이 흐르고, 장화와 홍련의 인생을 뒤바꿀 또 하나의 엄청난 사건이 발생한다. 배무용이 재혼을 하게 되면서 허씨라는 여인이 장화와 홍련의 계모로 들어오게 된 것. 남녀차별이 당연했던 조선 시대에 전처 장씨로부터 아들을 얻지 못한 배무용은,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재혼을 선택해야 했다.
허씨는 당시 스무 살에 불과하여 중년에 접어든 남편 배무용과는 나이 차이가 큰 데다 심지어 후처였다. 학자들은 조선 시대의 혼인 관습을 감안할 때 허씨라는 인물이 '몰락한 사대부 집안의 여식'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궁핍한 사정 탓에 좋은 혼처를 찾기 힘들었을 것이고 당시 기준으로 스무 살은 결혼 적령기로는 늦은 나이에 해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명망 높고 부유한 배무용으로부터 혼담이 들어오자 재혼이라고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소설 <장화홍련전>에서는 허씨의 외모를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얼굴이 한 자가 넘는 데다 두 눈은 퉁방울같고 코는 질병같고 입은 메기같고 머리는 돼지털같고, 키는 장승처럼 크고 목소리는 이리나 승냥이 소리 같았다"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표현만 놓고 보면 거의 사람이 아니라 무슨 짐승이나 괴물에 가깝다. 심지어 그 수위도 문학적 표현과 거리가 멀고 현대로 치면 명예훼손이나 인신공격 수준의 '악플'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실제로 외모에서 연상되듯이, 허씨가 극중에서 하는 행동 역시 대부분이 남을 헐뜯거나 괴롭히는 악행들 일색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의미심장한 비밀이 숨겨져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소설 <장화홍련전>의 원본(추정)에는 계모 허씨의 성격이나 외모 비하적 언급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면서 계모에 대한 내용이 각색-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소설이 유명해지면서 메인 빌런(악당)이 되는 허씨라는 인물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을 뿐 아니라, 극중 허씨의 포지션이자 모든 비극의 단초가 되는 '계모'라는 존재에 대한 당대의 부정적인 인식을 반영한다.
조선 시대는 지금보다 평균 수명이 짧았고, 특히 결혼한 여성들은 의학의 한계로 인하여 출산 후유증 등으로 요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남성의 재혼은 빈번해질 수밖에 없었다. 여성들은 자신이 죽고나서 남겨진 자식들이 후처로 들어온 계모에 의하여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을까라는 공포심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여성들의 계모에 대한 경계심과 거부감은 문학 속의 '악인 계모'를 탄생시키는 배경으로 이어진 것.
배무용과 허씨는 혼인 이후 무려 세 아들을 얻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어느덧 장화는 20세, 홍련은 18세의 성숙한 처녀가 됐다. 혼기가 찬 아름다운 두 자매에게 명문가들에서 잇달아 혼담이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계모 허씨는 이런 상황을 불편한 심기로 바라보고 있었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재산' 때문이었다.
조선 초기에 아내의 재산은 사망할 경우, 아내의 혈연에게만 상속됐다. 하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가부장제가 강화되면서 계모에게 대를 이을 아들이 있을 경우, 전처의 재산이라도 상속받는 게 가능해진다.
전처 장씨는 친정에서 시집오면서 많은 재산을 남겼다. 장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 유산의 상속자가 된 것은 두 딸 장화와 홍련이었다. 자매가 결혼하면 장씨의 유산도 함께 가져가게 되므로 허씨와 아들들은 더 이상 부유한 생활을 보장받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허씨는 재산을 유지하기 위하여 어떻게든 장화와 홍련이 시집가는 것을 막아야만 했다.
질투심에 휩싸인 허씨는 장화와 홍련을 구박하기 시작했다. 소설에서 배무용은 허씨에게 "우리가 빈곤하게 지내다가 전처가 친정에서 재물을 많이 가져와 지금처럼 넉넉하게 되었소. 부인이 지금처럼 편히 먹는 것도 그 덕이오"라며 허씨를 나무랬지만, 정작 딸들이 학대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보호하지는 않았다. 가문의 몰락으로 혼인시 많은 재산을 가져오지 못했던 허씨는, 전처와 비교하는 남편의 발언에 자격지심이 폭발하여 더욱 분개했고, 오히려 장화와 홍련에 대한 학대는 더욱 심해졌다.
어느날 혼인을 앞두고 있던 장화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허씨는 잠들어있던 장화의 방에 들어가 정체불명의 핏덩이같은 물건을 들고나왔다. 허씨는 배무용에게 핏덩이의 정체는 장화가 몰래 '낙태한 태아의 사체'라고 주장했다. 이는 배무용과 장화는 물론이고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할 만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배무용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정작 딸 장화에게 진실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조선시대에 여성의 낙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소문만으로도 개인과 가문의 명예가 실추되므로 일을 키우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에 허씨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배무용에게 "가문의 명예를 지키려면, 장화를 죽여 문제를 덮어야 한다"고 경악할 만한 제안을 부추긴다.
사실 이 사건은 모두 허씨가 꾸민 음모였다. 허씨는 배무용과 두 자매의 대화를 엿듣고, 잘못하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쫓겨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두 자매를 제거하기로 결심한 것.
배무용은 며칠 뒤 깊은 밤 장화를 불러 허씨의 아들인 이복동생 장쇠와 함께 갑자기 외갓집에 다녀오라고 지시한다. 숲속을 함께 지나던 이복남매는 한 연못 앞에 이르러 장쇠가 돌연 말을 멈추더니 장화를 억지로 끌어내렸다. 장쇠는 "이 연못이 누이가 억만년 지낼 곳이오. 누이가 낙태까지 했으니 누이를 죽일 수밖에 없소"라고 소리치며 본색을 드러낸다.
그제야 계모의 함정에 빠졌음을 눈치챈 장화는 홀로 남겨질 동생 홍련을 걱정하며 "너의 말대로 죽겠다. 허나 외가에 홍련을 보살펴달라 전할 시간을 다오"라고 눈물로 호소한다. 그러나 장쇠는 이복누나의 마지막 부탁을 냉정하게 거절하고, 장화는 끝내 연못에 빠져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목숨을 잃는다.
현대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아무리 이복형제라고 해도 같은 혈육인 남동생이 누나를 살해했다는 설정이나 심지어 '실화'라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여성의 순결을 강조했던 조선 시대에는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을 가문의 수치로 여겨서 가족들이 '명예살인'을 했던 경우도 종종 실제로 존재했다. 장화라는 여성이 누명을 쓰고 살해당한 이유와, 그 행위자가 하필 같은 혈육이자 남성인 장쇠라는 것은, 유교적 가치관을 내세워 여성의 권리를 억압하고 문란함을 죄악시하던 당시의 시대상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장쇠는 누나 장화를 죽이고 돌아오는 길에 호랑이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은 끝에 간신히 목숨만 건져 집으로 돌아온다. 실종된 언니의 행방을 걱정하던 홍련은 계모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장쇠를 찾아가 몰래 충격적인 진실을 듣게된다. 장화가 낙태를 하여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기에 연못에 빠져 죽었고, 이를 지시한 인물은 바로 아버지 배무용이라는 이야기였다.
홍련은 언니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려고 했으나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에서 자손-처첩-노비 등이 부모나 가장, 주인을 고발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혈육을 죽인 비정한 아버지라도 딸이 고발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홍련은 홀로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비통에 잠긴 홍련은 장화가 죽은 연못을 찾아갔다가 자신을 부르는 언니의 환청을 들었다. 집에서는 딸을 죽인 아버지와 자신을 괴롭히는 계모가 있었고 평생을 의지하던 언니는 세상에 없었다. 어차피 돌아갈 곳이 없었던 홍련은 언니의 목소리를 따라 연못에 몸에 던졌고 그렇게 역시 꽃다운 청춘을 마감한다.
딸 죽게 하고도 목숨 건진 아버지,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