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러나 복지를 버리는 시대로> 스틸 이미지
TV맨유니온
나는 이번에 상영되는 2편의 다큐멘터리를 네 번째로 보았다. 아마 국내에서 개인의 관람 회수만 놓고 본다면 가장 많이 봤음직하다. 하지만 그게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이 30년 넘은, 4: 3 화면비율에 비디오 수준 화질이 담긴 흔해빠진 것처럼 보일 분량과 형식의 시사 다큐멘터리에 감춰진 가치와 함의를 끊임없이 재발견하는 과정에 동참할 수 있었다는 게 즐거울 따름이다. 처음엔 그저 오래된 역사책 확인하듯 감독의 필모그래피 확인 차원에서 해당 작품을 보게 된 이들이 막상 영화가 끝나면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광경을 숱하게 목격했는데, 일단 세계적 거장의 초창기 방송 다큐멘터리에서 훗날 그의 쟁쟁한 극영화로 연결되는 수많은 고리가 눈에 밟히고, 감독이 꾸준하게 일본 사회를 조명하는 관점의 단초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감독의 명성이 더 커지고 작품목록이 늘어갈수록 이 초창기 작업들은 더 많이 호명될 운명인 것이다.
이 작품들은 국내에서 공식적으로 4회 소개된 바 있다. 그 4차례에 본인이 모두 등판한 셈이다. 이쯤 되면 결코 우연 아니라 어떤 운명처럼 느껴질 정도다. 첫 번째 국내소개는 2014년 15회 전주국제영화제 기간이었다. 당시 전주국제영화제에선 '출발로써의 다큐멘터리: 세 거장의 기원'이라는 기획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비롯한 동서양 거장 감독 3명의 초창기 다큐멘터리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당시엔 그저 평범한 관객으로 해당 영화들을 호기심으로 봤지만 그 감흥과 잔향은 결코 휘발되지 않았다. 당시 지방에서 아주 작은 영화제에 관여하고 있었던 터라 언젠 가는 저 특별한 작품들을 우리 지역에서도 소개하고픈 욕망을 남몰래 품었다. 하지만 실행까지는 꽤 험난한 고비를 넘어야 했다.
절치부심 끝에 4년 후, 2018년 9회 대구사회복지영화제 기획전 프로그램으로 '거장의 기원'이라는 제목 아래 전주에서 소개된 4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작품을 두 번째로 상영하게 되었다. 이번엔 프로그램 수급 교섭부터 계약서 작성 실무, 그리고 작품 소개까지 거의 모든 실무를 떠맡았다. 개별 관객으로 편안하게 영화를 즐기던 것과는 전혀 다른 감흥이었지만 고생해서 가져온 오래된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감상을 들으며 그 모든 수고가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2014년 전주, 2018년 대구에서 소개된 작품들은 1991년 작품 <그러나... 복지를 버리는 시대로>와 <또 하나의 교육>, 1994년 작품 <그가 없는 8월이>, 그리고 감독이 최초의 극영화를 완성한 후 공개된 1996년 작품 <기억을 잃어버린 때>까지 총 4편으로 각각 일본의 사회복지제도와 대안교육, 퀴어 에이즈 환자 투병기, 의료사고로 기억을 상실해가는 피해자와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지금은 '백만 구독자'를 보유한 영화 유튜버 김시선이 서울에서 내려와 전편을 관람한 후 인상 깊은 요약특집을 올린 바 있기도 하다.
2014년 전주와 2018년 대구 사이에는 작은 상황변화도 있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국내 인지도가 비약적으로 더 상승했고, 감독의 영화 자서전 격인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이 2017년 국내에 출간되면서 책에 언급된 감독의 초창기 다큐멘터리 작업에 대한 관심이 대폭 높아진 게 사실이다. 누구나 영화 좀 본다손 치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이름을 언급하는데, 막상 거장의 최초 기원은 누구도 목격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전주와 대구, 흔히 '지역'이라 불리는 비수도권에서만 상영되었기에 적잖은 이들이 낭패감에 빠진 셈이다. 그리고 서울 상영은 이후로도 아주 한참 더 기다려야 했다.
2022년 연말부터 논의되고 몇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2023년 초봄부터 상영회를 추진하던 중에 5월로 예정된 서울 국제환경영화제에서 이번 기획과는 전혀 무관하게 해당 작품들을 특별전 프로그램으로 상영하는 일정이 잡히기도 했다. 그래서 또다시 관객으로 해당 영화제에서 상영작을 관람하기도 했다. 서울국제환경영화제에서는 <그러나... 복지를 버리는 시대로>와 <또 하나의 교육>에 추가해 국내에선 상영된 적 없는 1992년 작품 <오염은 어디로 갔는가> 3편이 상영되었다. 최초의 서울 상영이 된 셈이다. 상영된 작품 중 <오염은 어디로 갔는가>는 감독의 TV 다큐멘터리 중에서 대표작인 <그러나... 복지를 버리는 시대로>의 소재 상으로 후속에 속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두 달 여가 지나 원래 예정보다 꽤 지연되긴 했지만 마침내 성사된 본 기획전으로 네 번째 관람을 완수했다. 처음 전주에서 이 영화들을 발견할 시점부터 치자면 햇수로 9년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TV 다큐멘터리 작품들과 인연이 이어지는 셈이다. 뭐 이 정도면 충분히 운명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거장의 기원'을 목격하는 낯설지만 경이로운 체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