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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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7년 5월, 장보고의 인생을 바꾸게 될 또 한번의 운명이 찾아온다. 신라의 왕족이었던 김우징이 장보고를 찾아온 것. 당시 쇠퇴기에 접어들던 신라는 귀족세력이 득세하면서 왕위계승을 둘러싼 권력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흥덕왕 사후, 유력한 왕위 후계자로 꼽히는 김우징의 아버지 김균정이 정적들에게 피살되고 살아남은 김우징이 장보고에게 찾아와 몸을 의탁한 것. 김우징은 장보고가 신라로 돌아올 당시 시중(국무총리)이였고, 흥덕왕과의 만남이나, 청해진 건설 등에서 장보고의 후원자로 활약하면서 자연스럽게 돈독한 관계를 맺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보고는 고심 끝에 김우징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이는 곧 신라 왕실과는 적대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한편 신라 중앙정계는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흥덕왕이 사망하고 집권했던 희강왕이 1년여 만에 사망하고 민애왕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민애왕은 김우징에게는 아버지를 죽이는 데 앞장선 철천지원수였다.
기회를 엿보던 김우징은 장보고를 설득하여 군사를 일으켜 왕실을 칠 것을 제안했다. 자칫하면 반역자로 몰려 그동안 쌓아올린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도박이었지만, 장보고는 "의를 따르지 않으면 용이 없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명령하시면 곧 따르겠습니다"라고 기꺼이 김우징의 편에 설 것을 선언한다. 김우징을 왕위에 올린다면 자신의 정치적 입지도 올라갈 것이라는 야심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김우징은 그 보답으로 훗날 자신의 후계자가 될 아들을 장보고의 딸과 혼인시키겠다고 약조한다.
838년, 장보고는 측근 정년에게 5000명의 군사를 주어 서라벌로 진격시킨다. 장보고군은 이듬해 '달벌전투'에서서 정부군을 격파하고 수도를 함락시키면서 민애왕을 제거한다. 김우징은 장보고의 후원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오르니 바로 신라 45대 신무왕이다.
즉위한 신무왕은 장보고의 공을 기려 감의군사로 봉하고 식읍 2천호를 하사했다. 이는 신라 삼국통일의 영웅으로 꼽히는 김유신이 받았던 식읍의 4배로 당시 장보고의 위상을 보여준다. 그렇게 장보고는 신라에서 최고의 지위와 재산을 겸비한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신라 중앙 귀족들은 평민 출신인 장보고의 득세를 탐탁치않게 여겼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장보고 역시 귀족들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일단 청해진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839년 7월, 신무왕이 즉위 6개월 만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장보고의 운명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은 아들 문성왕은 선대의 약속대로 장보고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려고 했으나 귀족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귀족들은 막대한 재산과 지위를 가진 장보고가 왕실과의 혼인으로 거대한 외척 세력으로 성장할 것을 견제했고, 장보고의 약점인 비천한 신분을 명분으로 내세워 반대했다. 문성왕은 결국 장보고 측과의 혼약을 포기한다.
841년(혹은 846년),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리던 장보고가 돌연 근거지인 청해진에서 염장이라는 인물에 암살 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삼국사기>에는 "장보고가 왕이 딸을 차비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원한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신라 중앙조정에서는 청해진에서 여전히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장보고의 존재는 큰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가 혼인 문제로 왕실에 앙심을 품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염장은 바로 신라 조정에서 내려보낸 자객이었다.
염장은 장보고의 쿠데타 당시 함께 종군하며 신무왕을 옹립하는 공을 세운 경력이 있었다. 염장은 왕실을 찾아와 "신의 말을 들어주신다면 한 명의 병졸도 번거롭게 하지 않고 장보고의 목을 베어 바치겠습니다"라고 제안한다. 장보고의 군사력을 두려워했던 신라 조정은 염장의 제안을 수락한다. 염장은 장보고를 찾아와 청해진에서 일하겠다고 제안했고, 장보고는 함께 뜻을 같이했던 염장을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방심한 장보고는 술에 취한 채 염장에게 살해 당하고, 한 시대를 풍미한 해상왕의 일대기는 그렇게 비극적인 최후로 막을 내린다.
장보고 사후에 염장이 그 세력을 흡수하여 청해진을 물려받았지만, 청해진의 주민들은 염장을 인정하지 않고 당나라와 일본 각지로 흩어졌다고 한다. 851년에 이르러 장보고를 따르던 사람들이 흩어지면서 동아시아 최대의 국제무역항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청해진은 끝내 폐쇄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오늘날 <삼국사기>의 많은 기록들이 의문점으로 남은 것처럼, 현대 학계에서는 장보고가 정말 반란을 일으킬 의도가 있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국익에 막대한 기여를 하던 장보고와 청해진의 몰락은, 이후 신라 역시 차츰 멸망의 길을 걷게 되는 징조였다. 청해진의 엄청난 경제적-전략적 가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장보고라는 걸출한 인물을 포용하기에는 너무나도 옹졸하고 편협했던 신라 지배층의 한계가 초래한 비극이었던 셈이다.
미천한 신분에서 출발하여 해상왕의 자리까지 등극한 장보고의 신화는 후대에도 많은 영감을 주었으며 훗날 왕건-견훤 등으로 이어지는 후삼국 시대를 여는 단초가 되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시대를 앞서간 장보고의 도전정신과 과감한 결단력이 오늘날까지 재조명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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