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드라마 <악귀> 한 장면.
SBS
처음부터 장승이 표지판으로 활용된 것은 아니다. 훨씬 오래 전에는 사물이 아닌 '인간 내비게이션'에 의지하던 시절도 있었다.
<고려사> 병지(兵志)에는 마지막 왕인 공양왕 때 이성계·정도전의 동지인 조준 등이 제출한 상소문이 나온다. 음력으로 공양왕 원년 12월, 양력으로는 1389년 12월 18일에서 1390년 1월 16일 사이에 나온 이 상소문은 여행하는 관리에게 관용 말을 넘겨주는 지로(指路)나 지로(知路)같은 역졸을 언급한다. 현지인들로 충원된 이들이 길 로(路)가 들어간 지로로 불린 것은 단순히 말을 넘겨주는 일만 한 게 하니라 길을 안내하는 일도 했으리라는 판단을 갖게 한다.
인간 내비게이션인 지로가 여행자를 위해 먼 데까지 동행해줄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여행자는 내비게이션이 해준 말을 기억하거나 기록해둘 수밖에 없었다. 이 내비게이션의 임무는 여행자가 다음 내비게이션을 만날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것이었다.
위 상소문이 나온 지 얼마 뒤인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됐다. 이 시기 사람들의 머릿속에 '인간 내비게이션을 통한 길 안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물을 이용한 이정표도 있었다. 건국 22년 뒤인 음력으로 태종 14년 10월 17일(양력 1414년 11월 19일)에는 도로의 거리를 새로 측정해 이정표를 세우라는 왕명이 있었다.
여기에 언급된 이정표는 후자(堠子)로 불린 흙더미 혹은 흙무덤이다. 베이징과 몽골 초원을 잇는 초원길에도 이와 비슷한 표지가 많았다. 말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멀찍이서 식별할 수 있도록, 언덕 위에 흙더미를 쌓아 이동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였다.
위 날짜 <태종실록>에 따르면, 호조(기획재정부)는 후자의 크기에 따라 소후와 대후를 나누어 정비할 것을 건의했다. "옛 제도에 의거해 자(尺)로 측량하여 10리마다 소후를 두고, 30리마다 대후를 설치해 1식(息)으로 삼으소서"라는 내용이다.
30리 간격인 대후와 대후의 거리를 1식으로 인정하라는 내용을 담은 이 건의는 후자를 처음 설치하자는 제안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리를 새로 측정해 후자를 세우자는 것이 건의의 핵심이었다. 그 전에도 후자가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정표의 재질이 꼭 흙더미로만 한정됐던 것은 아니다. 태종의 아들인 세종 때는 흙더미 외에 돌더미 또는 수목을 활용하라는 왕명이 있었다.
음력으로 세종 23년 8월 29일자(양력 1441년 9월 14일자) <세종실록>은 병조에서 새로운 거리 측정을 건의하면서 "30리마다 푯말을 하나씩 세우되, 토석을 모아놓든가 수목을 심어서 표지하게 하소서"라고 말한 사실을 알려준다. 세종은 이 건의를 재가했다.
위와 같은 제도적 정비들이 축적된 뒤에 나온 것이 15세기 후반부터 시행된 <경국대전> 공전(工典) 규정이다. "지방의 도로에는 10리마다 소후를 세우며 30리마다 대후를 세우고 역참을 둔다"는 규정이 이 법전에 들어갔다. 지금처럼 도로 표지판이 많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10리만 가면 이정표를 확인할 수 있게 해놓았던 것이다.
단순히 이정표만 달랑 세우는 것은 아니었다. 위 <경국대전> 규정에는 거리와 지명을 새기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오늘날의 도로 표지판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장승 표지판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토속 신앙을 반영하는 장승을 도로 표지판으로 활용했으니, 오늘날의 도로 표지판보다 훨씬 철학적인 안내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드라마 <악귀>에서는 이런 장승이 귀신의 이동과 관련이 있으리라는 상상력을 펼쳤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것이 역병균의 이동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장승을 세운 이유 중 하나는 호구마마로 불리는 천연두 등이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데 있었다. 일종의 팬데믹 관리 차원에서도 장승을 활용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도로 표지판은 인간의 이동을 돕는 동시에 병원균의 이동을 막는 의미가 있었다. 오늘날과 달리 조선시대 표지판에는 철학적 의미와 더불어 보건의학적 의미도 담겨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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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