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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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덕혜옹주는 24세가 되던 해에 소 다케유키와 결혼하게 된다. 당시 조선의 신문사들은 덕혜옹주의 결혼 소식을 보도하면서 일본인 남편의 사진은 일부러 삭제하고 오직 덕혜옹주의 모습만을 보도했다. 일제의 강제 정략결혼에 대한 조선인들의 분노 어린 여론을 대변하는 반응이었다.
결혼 이후로 덕혜옹주의 소식은 오랫동안 국내에 더 이상 전해지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결혼하면 아내가 남편의 성씨를 따라 바꾸게 된다. 조선에서는 대한제국의 황녀이던 덕혜옹주가 일본인과 혼인하며 일본인 성씨로 개명하게 된 현실을 차마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게 덕혜옹주는 조선에서도 잊혀지며 대한제국 황녀로서의 정체성을 부정 당하고 오직 일본의 백작부인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나마 다행히 정략결혼이었음에도 덕혜옹주와 일본인 남편 간의 사이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덕혜옹주는 결혼 1년 만에 딸 정혜(마사에)를 출산하며 엄마가 됐다.
그런데 겉보기에 평온을 찾아가는 듯했던 덕혜옹주 가족에게 또다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어느날 대마도를 방문했던 덕혜옹주 부부에게, 남편의 지인들이 인사를 청했으나 덕혜옹주가 아무 반응도 없이 가만히 서 있더니 돌연 미친 듯이 소리내어 웃기를 거듭했다고 한다. 목격자인 히라야마 타메타로의 일기에 따르면 "정말 병적인 거동이었다"고 기록할 만큼 옹주의 갑작스러운 기행에 모두가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덕혜옹주의 조현병이 다시 악화된 것이다.
당시는 정신의학이 지금만큼 전문적으로 발전하지 못하여 치료방법도 마땅치 않았던 시절이었다. 또한 정신질환 환자에 대한 사회적 의식 수준도 낮아서 정신병 환자를 부끄러운 치부 정도로 취급하고 감추기 일쑤였다. 마음을 의지할 곳도 없었던 일본에서 덕혜옹주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는 어려운 환경이었을 것이다.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한국은 마침내 독립에 성공했지만, 정작 덕혜옹주에게는 또다른 시련의 시작이었다. 패전으로 일본의 귀족제도가 폐지되면서 귀족들은 작위를 박탈 당하고 막대한 재산세까지 내야 했다. 소 다케유키의 가문 역시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었다. 덕혜옹주 역시 남편의 몰락과 함께 세상에서 한동안 자취를 감췄다.
덕혜옹주가 사라진 지 4년 뒤인 1950년, 서울신문사 기자였던 김을한은 덕혜옹주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하여 일본 도쿄에 방문한다. 그는 어린 시절 덕혜옹주와 혼담이 있었던 김장한의 형이었고, 가문간의 인연으로 인하여 행방이 묘연해진 덕혜옹주를 찾아나선 것.
놀랍게도 김을한이 덕혜옹주를 발견한 곳은 일본 도쿄의 한 정신병원이었다. 남편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의 상태가 악화되고 경제적 곤궁으로 인하여 간병인을 구하기 어렵게 되자 그아내를 정신병원으로 보낸 것이다. 병원비는 남편 소와 오빠 영친왕이 감당해주고 있었다. 한때 대한제국의 황녀로 만인의 사랑을 받던 덕혜옹주의 비참하고 쓸쓸한 현실에 큰 충격을 받은 김을한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녀를 고국으로 다시 돌려보내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는 덕혜옹주의 귀국을 달가와하지 않았다. 대한제국 왕족이 한국으로 돌아오면 일종의 구심점이 되어 정부를 위협할 존재가 될 수있다는 경계심 때문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건국된 지 얼마되지 않은 데다 6.25 전쟁까지 발발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 황족들의 문제까지 관심을 기울일 만한 여유가 없었다. 정치적 이유로 인하여 조국에서도 외면 받은 덕혜옹주는 그 이후로도 오랜 세월을 일본의 정신병원에서 계속 보내야 했다.
몸과 마음이 편치 않은 와중에도 덕혜옹주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55년경, 덕혜옹주는 남편 소 다케유키로부터 별거 10여 년 만에 결국 이혼을 당했다. 이는 덕혜옹주를 대신하여 오빠 영친왕과 소 다케유키 간의 합의에 의한 결정이었다고 한다. 또한 이듬해에는 덕혜옹주의 유일한 자녀였던 딸 마사에가 돌연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마사에의 행적은 이후 끝내 밝혀지지 않았고 오랜 세월은 흐른 뒤 시신없는 사망으로 처리됐다.
다시 세월이 흐르고 1962년 1월 26일 김포공항, 입국장에서 들어선 한 중년의 여인에게 카메라 플레시가 쏟아지며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바로 덕혜옹주가 무려 37년 만에 고국 땅으로 완전히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대한제국 황족들에게 부정적이었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고심끝에 덕혜옹주의 귀국을 전격 수용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덕혜옹주의 귀국을 위하여 누구보다 앞장서서 노력해온 인물이 김을한이었다. 그는 "황족들은 일본에 제발로 간 게 아니라 강제로 끌려간 것이다. 이들을 방치하는 건 우리의 책임"이라며 정부를 간곡히 설득했다. 그렇게 14세에 강제로 일본으로 떠나야했던 소녀는 어느덧 51세의 지천명이 되어서야 정든 고국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
덕혜옹주가 귀국하던 날, 돌연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린 한 여인이 있었다. 바로 어린 시절 궁궐에서 덕혜옹주를 돌봤던 유모 변복동씨였다. 당시 72세의 고령에도 살아있었던 변씨는 긴 세월을 지나 다시 만난 덕혜옹주의 손을 붙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후 변씨는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변함없이 덕혜옹주의 곁을 지켰다.
귀국한 덕혜옹주는 정부 측의 배려로 창덕궁에서 여생을 지내게 된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27년이 지난 1989년, 덕혜옹주는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덕혜옹주의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에서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던 아버지 고종의 무덤 바로 뒤편에 세워졌다. 부녀는 세상을 떠난 후에야 오롯이 다시 함께 할 수 있게 됐다.
덕혜옹주의 삶이 주목을 받고 그 행적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면서 과도한 미화와 폄하가 모두 공존하는 게 사실이다. 덕혜옹주는 독립운동가나 지식들처럼 시대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인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친일파처럼 시대에 영합하고 부귀영화만 추구했던 인물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가 있다.
그녀는 오히려 대한제국의 황녀 신분으로 태어났다는 민감한 정치적 위치 때문에 감시 당하고 이용 당하는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다. 힘없는 망국의 황족이자 여성이라는 환경적 한계 속에서 그녀가 평생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전무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일본에서 겉으로 황족-귀족 대우를 받으며 평안을 누린 듯 보여도 정작 덕혜옹주에게 그런 삶이 과연 행복했을까. 결국은 그녀 역시 일제강점기라는 비극에 원치 않게 휩쓸려야 했던 수많은 희생양 중 한 명일 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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