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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르지 말기' 카사노바는 어떻게 여인의 마음을 훔쳤나

[TV 리뷰] tvN <벌거벗은 세계사>

23.06.07 15:23최종업데이트23.06.07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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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우리가 지닌 최고의 보물은,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다.' <카사노바 자서전>의 서문에 실린 문장이다.
 
자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Giacomo Girolamo Casanova, 1725-1798)는 오늘날 단순하게 '바람둥이'의 대명사로만 많이 알려졌지만, 동시에 18세기 유럽을 풍미한 희대의 문제아이자 풍운아이기도 했다. 실제의 카사노바는 사회적인 업적을 남긴 것도, 도덕적으로 본받을 만한 인물이라고도 할 수 없지만,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그 자체로 혼란스러운 시대상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을 상징한다는 데 주목할 만하다.
 
6월 6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02회에서는 '카사노바는 어떻게 프랑스 상류층을 뒤흔들었나' 편을 통하여 카사노바의 일대기와 그의 이름이 아직까지도 전 세계에 회자되고 있는 이유를 조명했다. 유럽사 전문가인 임승휘 선문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조용하고 병약한 아이였던 카사노바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나는 여자를 위하여 태어났다는 사명을 느꼈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하여 내 전부를 걸었다', '나는 사랑에 굴복할뿐 사랑을 정복하지 않는다' 카사노바가 실제로 남겼다는 어록들이다. 사랑과 예술의 유혹자, 자유로운 쾌락주의자까지 카사노바를 수식하는 표현들은 다양하다.
 
카사노바는 172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평민 가문에서 6남매 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세기 베네치아는 유럽인들에게 '꿈의 도시'로 불렸다. 동서양 무역을 연결하는 항구도시로 수많은 사람들이 번성했고,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매춘과 도박 등의 퇴폐 향락 산업도 발달했고, 이는 카사노바의 가치관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린 시절의 카사노바는 의외로 조용하고 병약한 아이였다고 한다. 카사노바의 자서전에 따르면 어릴 때 한 마녀를 만나 '연금술(Alchemy)'을 접하게 되면서 신비한 체험을 했다고 주장했고, 이는 훗날 카사노바의 인생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당시 8살의 어린 나이에 벌써 '출세'를 자신의 인생의 목표로 삼았을 만큼 떡잎부터 범상치 않은 기질을 드러낸다.
 
카사노바는 부친이 사망한 이후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똑똑했던 카사노바는 어릴 때부터 달변가로 유명했고, 불과 12살의 나이에 당시 유럽 최고 대학인 파도바에 입학하여 5개 국어와 펜싱, 승마, 춤 등을 섭렵하면서 훗날 사교계 입문을 위한 필수 코스를 모두 마스터했다.
 
젊은 시절 카사노바의 인생 목표는 성공한 직업을 갖는 것이었고, 출세를 위하여 법학도에서 성직자와 군인까지 두루 거쳤지만 정작 어느 하나도 성공적으로 정착하지는 못했다. 출세만큼이나 세속적인 즐거움도 포기할 수 없었던 카사노바는 낮에는 직업을 수행하면서도 밤에는 본능을 드러내며 사람들과 어울려 유흥을 즐기고 사기도박에 빠져 돈을 탕진하기도 했다. 훗날 카사노바는 자서전에 당시에 얻은 깨달음으로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색깔을 반영할 수 있는 카멜레온이 되어아한다. 나는 그런 자질 중 융통성밖에 가진 게 없었다"라고 서술하기도 했다.
 
빈손으로 베네치아로 돌아온 20대의 카사노바는 한때 생계를 위하여 하층 직업인 바이올린 연주자로 취업해야 할 만큼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그럼에도 신분상승의 꿈을 놓지 않았던 카사노바는, 베네치아 원로원 의원이자 행정장관의 동생인 귀족 출신 브라가딘이라는 인물과 친분을 맺게 되며 인생역전의 기회를 맞이한다.
 
카사노바는 갑작스러운 뇌출혈 증세를 일으킨 브라가딘을 적극적으로 병간호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호감을 얻게 된다. 카사노바는 점술로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알아낼 수 있다고 주장했고, 브라가딘은 이런 카사노바에게 푹 빠져 급기야 자신의 양아들로까지 받아들인다. 평범한 평민이자 인생 낙오자였던 카사노바가 한순간에 귀족으로 위상이 급상승하는 순간이었다.
 
한순간에 귀족이 된 그

22세의 카사노바는 본격적으로 여인들의 마음을 훔치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카사노바는 연애방식은 철저히 '상대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주는 방식으로, 여인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카멜레온 같은 면모를 드러냈다고 한다. 발음에 약점이 있는 여배우를 위하여 하루 만에 극본을 완벽하게 고쳐써줬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카사노바의 엽기적인 여성편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가 있다. 카사노바는 28세에 당시 15세의 소녀였던 카테리나 카프레타(추정)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카테리나의 아버지가 교제를 반대하며 딸을 수녀원으로 보냈지만 그럼에도 카사노바는 아랑곳하지않고 그녀와의 밀회를 이어갔다. 그런데 카사노바는 해당 수녀원에서 마리나 모로시니(추정)라는 또다른 여성을 만나게 된다. 심지어 마리나에게는 베네치아 주재 프랑스 대사여던 베르니라는 오래된 연인이 있었다.
 
문제는 이들도 하나같이 정상적인 인물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 마리나가 양심의 가책을 못이겨 카사노바와의 관계를 고백하자 베르니의 대답은 놀랍게도 "당신과 카사노바가 사랑하는 모습을 훔쳐보게 해준다면 만나도 된다"는 것이었다. 카사노바는 이를 수락했고 세 사람은 종종 함께 만나는 기묘한 관계를 이어갔다. 추가로 마리나와 카테리나 역시 동성간임에도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는 사이로까지 발전한다. 그야말로 현대의 어지간한 막장드라마는 뺨칠 정도로 희대의 4각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카사노바는 이외에도 유부녀, 여관집 딸, 남장 여배우 등 신분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다양한 여성들과 로맨스를 즐겼다. 하지만 30세에 접어들며 카사노바의 난봉꾼 인생에도 첫 위기가 찾아온다. 베네치아 공화국 정부는 문란한 여성편력과 매춘부 폭행 사건 등으로 요주의 인물이 된 카사노바의 행적을 1년간 사찰한 끝에 사기죄 등으로 5년형을 선고하고 피옴비 감옥에 수감시킨다. 약 일 년 반 만에 카사노바는 탈옥하며 프랑스로 도주한다.
 
프랑스는 당시 부르봉 왕조 치하에서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귀족문화가 발달했다. 카사노바는 이전부터 파리 생활을 동경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카사노바는 과거 4각관계로 친분을 맺은 베르니와의 인맥을 통하여 파리 사교계에 입문했다.
 
달변가인 카사노바는 자신의 탈옥 이야기를 무용담으로 꾸며 프랑스 귀족들로부터 인기를 끌었다. 또한 상류층과 맺은 인맥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고질적인 재정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복권 사업'을 제안한 것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왕실과 정부의 신임을 얻게된다.
 
이어 카사노바는 18세기 프랑스 사교계 모임을 상징하는 '살롱(Salon, 상류층 저택에 손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꾸며놓은 방)' 문화를 통하여 프랑스의 귀족-지식인들과 교류하여 사회적 지위를 쌓았다. 특히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정부이자 당대의 인플루언서였던 퐁파두르 부인에게 인정받으면서 프랑스 사교계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자신감을 얻은 카사노바는 프랑스에서도 귀족여성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주특기인 화려한 여성편력을 이어갔다. '서두르지 말기', '그녀에게 헌신하기'로 요약되는 카사노바의 연애스킬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가 주스티니아나 윈(XCV)이라는 귀족 여성과의 일화다. 카사노바는 주스티니아나가 조심스럽고 신중한 성격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시간을 들여 편지와 고백으로 마음을 여는가하면 본능을 억누르고 진도를 자제하며 그녀의 신뢰를 쌓았다. 주스티니아나는 결국 카사노바의 전략에 따라 몸과 마음을 바칠 만큼 홀딱 반하게 된다. 이 에피소드는 훗날 영화 <위험한 관계>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등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카사노바와 연금술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한편으로 카사노바에게도 진심 어린 순애보적인 면모도 있었다. 미혼 여성의 출산이 죄악으로 여겨지던 시기에, 주스티니아나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며 곤경에 처할 위기에 놓이자, 카사노바는 본인의 아이가 아님에도 몰래 그녀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주며 그녀를 돕기도 했다. 하지만 염문이 퍼질 것으로 두려워한 그녀의 가문은 주스티니아나가 출산한 이후 다른 남자와 몰래 결혼시키며 카사노바 인생의 몇 안 되는 순애보는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양한 여성들을 가리지 않았던 카사노바가 이례적으로 유일하게 건드리지 않았던 여성은 바로 그의 약혼녀인 마농 발레티 정도였다. 카사노바는 자신의 파리에서 친아들처럼 챙겨준 여배우 실비아의 딸이었던 마농과 결혼을 약속했으나 약혼자로의 의무만 다했을뿐 그 이상의 관계는 맺지 않았다. 카사노바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마농은 여러 차례 자신의 마음을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끊임없는 스캔들을 참다 못해 카사노바를 떠났다.
 
또한 카사노바는 본인만이 아니라 국왕 루이 15세의 문란한 사생활에도 개입했다. 카사노바는 평민 출신의 모르피라는 여성을 만나 그녀와 두 달간 한방을 쓰며 누드화를 그렸고, 그 복제본이 루이 15세의 눈에 까지 들게 되며 모르피는 국왕의 정부가 된다. 프랑수아 부셰의 작품인 <금발의 오달리스크>(1851)가 바로 모르피를 대상으로 한 그림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으로 카사노바는 베네치아 시절에 이어 또다시 연금술을 내세운 사기행각을 이어갔다. 카사노바의 영향으로 프랑스 상류층에서 연금술이 유행했고 많은 상류층들이 카사노바에게 관심을 보였다. 이 중 카사노바의 최대 피해자는 뒤르페 부인이라는 인물로, 평소 남자로 환생하고 싶다는 소원을 가졌던 그녀는 카사노바가 연금술로 자신의 꿈을 이뤄줄 것이라고 믿으며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카사노바의 사기극이 결국 만천하에 탄로나면서 분노한 루이 15세는 프랑스에서의 추방령을 내리게 된다. 이후 카사노바는 영국, 러시아, 스페인, 폴란드 등 유럽 전역을 전전하며 재기를 모색했지만 더 이상 이전처럼 그를 환대해주는 곳은 없었다.
 
결국 카사노바는 이탈리아에 돌아와 나폴리에서 도박사로 활동하다가, 베네치아 정부의 밀정 업무를 수행하는 대가로 사면을 받고 18년 만에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9년 만에 폭행싸움에 휘말린 카사노바는 다시 베네치아에서 추방당했고 이후로 체코 둑스섬의 한 도서관에서 사서직을 제안받아 그곳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카사노바는 67세 무렵부터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자서전을 집필하기 시작했고 약 3700쪽에 이르는 초고를 완성했다. 그러나 선정적인 내용이 많다는 이유로 생전에  출판계는 자서전을 내는 것을 꺼렸다. 결국 카사노바는 자신의 자서전이 출판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798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사인은 묘하게도 비뇨기 질환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카사노바가 남긴 원고는 친척들에 의하여 독일 출판사로 넘어가 지나치게 민감한 부분은 걸러내고 출판되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2010년 2월 18일, 프랑스 정부와 국립도서관은 프랑스어로 제작된 카사노바의 자서전 원고 원본을 960만 달러(한화 126억)에 매입하여 세상에 공개하는 결정을 내린다. 카사노바 자서전의 역사적-문학적 가치를 인정한 것이었다. 당시 프레데릭 미테랑 문화통신부 장관은 "모든 사람이 전 세계에 없어서는 안 될 작품을 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카사노바라는 인물은 뛰어난 사상가도 영웅도 아니었다. 심지어 부정적인 면만 놓고보면 그저 유럽 상류사회를 농락한 사기꾼이자 천하의 바람둥이에 불과했다고 볼수도 있다. 그럼에도 카사노바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않는다"고 밝혔고, 그의 이름은 아직까지 전 세계에 회자되고 있다.
 
브루노 라신 프랑스 국립도서관장은 "당대 사회상을 날카로운 시각으로 관찰-기록한 유럽인"이라는 평가를 내린 것이, 카사노바의 인생과 그 기록이 남긴 가치를 함축하고 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던 당시 18세기 유럽에서 카사노바는 자신의 인생을 살아남기 위한 '삶의 방식 중 하나'로 여겼다. 그가 남긴 기록은 후대에까지 온전히 전해지며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당시의 시대상과 인간군상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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