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한 장면.
SBS
시간은 다시 1990년대로 돌아온다. 유골을 발굴해낸 김은희씨와 탐사대 일행은 바로 4.3 연구소 소속의 연구원들이었다. 당시 캠코더로 현장을 직접 촬영한 은희씨는 유골들이 4.3과 관련된 인물들임을 직감했다.
탐사대는 동굴 내에서 미스터리한 흔적들을 잇달아 발견해냈다. 당시 동굴에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생활했던 흔적이 있었고, 유골들은 생전의 모습이 연상될 만큼 줄지어서 나란히 질서정연하게 누워있었다. 탐사대는 희생자들이 혹시 집단 자살을 한 것은 아닐까 추측하기도 했다.
당시 김종민 <제민일보> 기자는 인근 동굴에서 살았다는 제주도민 채정옥 할아버지을 만나 제보를 듣게 된다. 김 기자와 4.3 연구소 사람들이 들은 진실은 충격적이었다.
희생자들은 모두 종달리와 인근의 평범한 주민들이었다. 이들은 4·3 사건 이후 토벌대의 탄압과 학살을 피하여 어쩔 수 없이 산으로 숨어든 사람들이었다.
토벌대는 처음엔 굴안으로 총을 쏴대며 위헙했으나 주민들이 아무도 나오지 않자 아예 굴을 막고 산에 불을 질렀다. 피난처에 숨어었던 주민들은 입구가 돌로 막히면서 불길 속에 갇혀 죽어가야 했다.
당시 시신들은 입구 벽쪽에 몰려 있었고 돌 구석이나 땅속에 코를 파묻은 상태였으며 눈코입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희생자들이 숨을 쉬지 못하고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며 괴롭게 죽어갔음을 보여주는 안타까운 장면이다.
당시 간신히 화를 피한 채 할아버지는, 토벌대가 떠난 후 참혹한 광경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시신을 수습했다. 시신을 하나하나 가지런히 눕히고 번호와 이름을 기록하며 역사의 증거를 남겨놓았다고.
1997년 인터뷰에서 채 할아버지는 "제주 4·3사건 이후 종달리에는 서북청년단이나 군경이 수시로 찾아와 젊은 사람들을 괴롭혔다"고 회상하며 "사람들은 '여기서는 죽는다' 싶었지만 계엄령 때문에 육지나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으니 피할 곳은 결국 산밖에 없었다. 다랑쉬굴 사람들도 그 굴속에 있다가 토벌대를 만나게 된 것이다. 내가 알기로 그들은 4·3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었다"라고 증언했다.
다랑쉬굴에서는 복순씨의 오빠 명립씨, 광언-광치 형제의 부모님 유해도 발견됐다. 1992년 다랑쉬굴 유해 발굴 소식이 전해지며 오랫동안 묻혔던 제주 4·3 사건의 진실도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명립씨는 경찰의 추적을 피해 산으로 도주했다가 다랑쉬굴 피난처까지 오게된 것. 종달리 복순이네에서 다랑쉬굴까지는 불과 12Km거리였다. 복순씨는 40년간 행적도 모르고 그리워했던 오빠가 바로 지척에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당시 직업군인으로 30년째 복무중이던 광언씨는 군인들이 자신의 가족들을 죽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전역을 6개월 남겨놓은 상황에서 스스로 군복을 벗어버렸다.
하지만 당시 관련자들은 제주 4·3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것을 은폐하려 했다. 유족들은 유해 수습과 진상조사를 원했지만, 상부에서 모종의 압력으로 다랑쉬굴 입구는 시멘트로 봉쇄됐고 유골은 화장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일방적인 졸속처리로 행정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유족들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긴 세월 동안 빨갱이 가족 취급을 받으며 살아온 유족들은 어떤 항의도 하지 못한 채 가족들을 떠나보내며 또다시 무기력함에 빠져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랑쉬굴 유해발굴은 44년간 베일에 가려져 있던 제주 4·3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중요한 기폭제가 됐다. 그로부터 7년 만인 1999년 최초로 ' 4·3 특별법이 통과되며 제주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가 이뤄질 수 있게 됐다. 2003년에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원수로는 최초로 국가 권력의 불법적 행사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며 공식 사과했다. 제주 4·3 사건이 일어난 지 무려 56년 만이었다.
그 당시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함께 눈물을 흘렸다. 희생자와 유족들에게는 그간의 오명을 벗어나 당당하게 역사 앞에서 세상의 빛을 받을 수 있게 되는 순간이었다. "평생 산폭도라는 이야기를 듣다가 이제는 '희생자'라고 해주니, 그것만으로 오빠의 한을 풀어서 만족한다"는 유족 복순씨의 이야기는 가슴을 울린다.
제주 4·3 평화공원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방문하는 제주의 성지가 됐다. 보수와 진보 정권을 떠나 역대 대통령들도 제주 4·3의 가치와 의미를 인정하는 역사로 거듭났다.
하지만 아직 해결되지 못한 과제들도 남아 있다. 당시 행방불명되어 아직 유골도 찾지 못한 피해자들, 불법 재판을 받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희생자들, 평생을 고통에 시달렸던 유족들에게 제주 4·3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사건이다.
제주도는 오늘날 전세계가 사랑하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아름다운 평화의 섬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 땅 위에서 가슴아픈 비극이 존재했다는 사실, 왜 그런 비극이 벌어졌는가라는 성찰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몫으로 남겨졌다. 어두운 시대에도 진실을 밝히기 위하여 애썼던 누군가의 작은 노력들이 모여 제주 4·3 사건이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처럼, 역사는 모두가 함께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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