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자랑"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사 진진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연극 활동에 흠뻑 빠진 엄마들은 예전엔 생각조차 못했던 갈등 또한 겪게 된다. 바로 공연 배역 주도권 다툼이다. 엄마들은 자신의 비중을 따지며 불만을 품고 서로 간에 골이 깊어져만 간다. 연출 감독도 쉽게 해결되지 않다 보니 골머리가 아프다. 별것 아닌 듯 보였던 반목이 점점 심해져 극단에는 이탈자도 등장하고 만다. 알고 보니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극단 단원들은 자녀들을 추억하고자 서로 'OO엄마'로 호칭하는데, 아이들을 닮았는지 끼가 있고 적성에 맞는 이와 덜한 이가 구분되고 중요 배역 편중이 일어난다. 누군가는 좀 더 평등하게 역할이 분배되어야 한다 생각하지만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기준은 쉽게 형성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화면 가득히 세 번째 자막이 오른다.
"하지만 모든 엄마가 돌아오지는 않았다. 김태현 감독은 결국 전문 배우를 섭외해 '장기자랑' 연습을 이어간다."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뤘던 이전 공연들과는 달리 세 번째 창작공연은 바로 그들의 자녀들이 수학여행에서 장기자랑에 나간다는 내용이었기에 한 치의 양보도 힘들었으리라. 그런 갈등이 해소되지 않자 4년 넘게 함께 해왔던 동료들 중 일부가 극단을 떠나버린다. 단원들은 서운함과 속상함을 토로하는데 뒤끝도 장난 아니다. 비온 뒤에 땅이 굳듯 그렇게 다툼은 일정부분 해소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장기자랑' 준비과정이 진행된다.
연습과정에서 비록 툭탁거림은 있었지만 차근차근 준비가 갖춰지던 때, 사건이 발생한다. 단원고등학교 4.16 당일 추모공연으로 '장기자랑' 공연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극단 내외에서 토론이 진행된다. 누군가는 엄마들이 학교에서 사고 당일 날짜에 공연하면 오히려 상처를 헤집는 게 아닐까 걱정한다. 엄마들도 의견이 분분해진다. 아이들을 추념하기 위해 기꺼이 공연에 응할 의사는 있지만 현장에서 과연 견뎌낼지는 자신이 없기도 하다. 그런 안팎의 다면적 염려와 극단 단원들 각자 고민이 교차한다. 하지만 정작 그런 고뇌 과정에 비해 공연은 어이없는 해프닝처럼 끝내 불발되고 만다.
그리고 이야기는 방향을 튼다. 단원고등학교 공연이 좌절된 것처럼 2016-2017 촛불로 집권한 정부에서도 진상규명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유가족들은 공연 대신 투쟁에 몰입한다. 노란리본 활동은 잠정 중단되고 다시 엄마들은 대책위의 일원으로 거리에 나선다. 피켓을 들고 행진을 펼치며 삭발농성에 나선다. 고생스러운 풍경이 안쓰럽지만 투쟁현장에서 엄마들의 표정은 결연하다. '악착같이' 밥을 먹는다는 한 마디가 잊히지 않는다. 그렇게 주인공들이 처한 엄혹한 상황을 전시하는 일련의 순간들은 영화 전체의 기조에서 다소 유리된 것 같지만 구구절절 설명 없이 이들이 속한 물리적 조건을 관객들에게 환기시켜주는 기능을 담당한다. 꼭 해야 할 이야기는 하고 마는 스타일이다.
다시 기회가 찾아오고 엄마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학교에 들어선다. 결국 엄마들은 단원고등학교 체육관에서 자녀가 끝내 못 다 한 장기자랑 공연을 마친다. 영화가 은근슬쩍 편집에 공을 많이 들였는데 특히 이 순간 장면전환은 치밀함이 돋보인다. 아이들이 끝내 도착하지 못한 제주 바다와 수학여행의 꿈이 엄마들에 의해 완수되는 '장기자랑' 연극의 내용 전환이 실로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그리고 각자가 품었던 묵은 한의 아주 일부가 초현실적인 묘사와 함께 해소된다.
그리고 이들은 이제 자신들의 네 번째 공연을 준비하는 중이다. 다시 치열하게 배역 다툼을 벌이는 대목에선 피식 웃음이 난다. 하지만 이전의 소모전과는 다르게 일정부분 경험치가 축적된 단원들은 슬기롭게 건설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고 차가운 세상에 남겨진 엄마들의 생존투쟁은 계속된다.
지금 등장해야 할 '세월호 영화'의 모범적 일례
▲"장기자랑"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영화사 진진
<장기자랑>을 만든 이소현 감독은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감성'을 얼음과 불처럼 겸비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우리 사회 전반에 거대한 상처로 남은 사회적 참사에 대해 다룬다는 건 위태로운 도전이다. 그런 엄중한 상황과 복잡한 정세를 감독은 깊숙이 인지하고 2023년 지금 시점에서 필요한 담론은 무엇인가 고민하고 또 고민한 결과물로서 <장기자랑>을 세상에 내놓았다.
겉보기엔 세월호 유가족들의 현재 삶을 눈물과 분노보다는 휴먼 드라마로 적당히 가공한 변주처럼 보이겠지만 이 영화는 만만치 않은 인식의 전환을 우리들에게 요청한다. 무엇보다 주인공들을 우리와는 멀찍이 다른 존재가 아닌 이웃으로 복권시킨다. 진실에 다가서는 걸 두려워하거나 망설이다 보면 종종 우리는 희생자와 유가족, 그들을 도와 함께하는 연대자들을 '특별한' 이들로 격리시켜버리곤 한다. 대단한 활동가이거나 가련한 희생자로 말이다.
하지만 <장기자랑>에서 유머 포인트로 소개되는 배역 다툼조차 실제로는 그런 색안경을 우리에게서 벗겨내기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여기에 여태까지 잘 드러나지 않았던 쟁점과 과제, 예를 들어 희생자와 생존자 간의 결 차이 같은 문제가 구체화된다. 세월호를 다룬 타 영상작품에서 주인공으로 출연하기도 했던 '생존자' 애진 가족이 유가족과 함께 활동하는 상황에서 겪는 고민지점은 특기할 만하다.
영화는 극도로 절제된 방식으로 세월호 참사와 유가족들의 이후 삶을 다룬다. 사고의 진실을 밝히는 게 지상과제라 생각하는 이들에겐 이 영화의 방향성은 너무나 미지근할지도 모른다. 진상규명을 훼방하는 자들에 대한 규탄과 응징에 꽂힌 이들에겐 본 작품의 내용은 당장 최우선과제와 동떨어진 그저 변죽만 울리는 것처럼 인식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적당한 중용과 접근성이 이 영화의 절대적 강점으로 의도되었다는 걸 곧 깨닫게 된다. <장기자랑>의 그런 적절한 수위조절과 균형감각 덕분에 영화는 벌써 내년이면 10주년을 맞이하지만 여전히 실체적 규명은 미흡하기만 한 실정에서 바로 지금 꼭 필요한 작업으로 자리매김한다.
이 영화가 소개하는 내용은 '인두겁'을 쓰고 있다면 함부로 부정하거나 폄하하기란 불가능할 정도로 정제되어 있다. 과거를 망각하고픈 우리 사회 내면의 그릇된 욕망을 점잖게 타일러 돌려놓으려는 태도를 시종일관 고수하며 핑계를 부리려는 이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그렇게 아직 잊으면 안 된다고, 조곤조곤 설득하며 간절히 호소하는 본 작품의 위력은 '외유내강' 그 자체라 하겠다.
그렇게 <장기자랑>은 유가족들이 거리에서 서명과 선전전을 할 때 지나가길 망설이는 우리들의 속내를 빤히 응시하며 정중한 태도로 세월호의 기억을 소환하고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음을 말한다. 그런 탁월한 효용과 명확한 목표 설정 때문에 <장기자랑>은 가능한 많은 이들에게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작품정보>
장기자랑 The Talent Show
2022|한국|휴먼 다큐멘터리
2023. 4. 5. 개봉|92분|12세 관람가
감독 이소현
출연 수인 엄마(김명임), 동수 엄마(김도현), 애진 엄마(김순덕),
예진 엄마(박유신), 영만 엄마(이미경), 순범 엄마(최지영),
윤민 엄마(박혜영), 연극 연출(김태현)
PD 이보람
촬영 민준원, 이큰솔
편집 김형남, 구윤주, 이소현, 황다경
사운드 소나기 사운드
음악 권현정
협력 4.16가족극단 노란리본,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제공/제작 영화사 연필
공동제공/배급 ㈜영화사 진진
2021 22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옥랑문화상
2022 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한국쇼케이스
2022 48회 서울독립영화제 장편쇼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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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5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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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엄마'들의 장기자랑, '기이한' 장면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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